고양이한테 애교를 부린다는 사실을 깨달은건 동물병원에서였다.

 

정상적인 여자의 말투로 수의사쌤이랑 얘기를 하고 있었다. 쌤이 고양이 꺼내놓으라고 하는순간. 갑자기 애교가 나오기 시작한다.

 

 

"고양이야 오느라 힘들었쬬오? 이제 나와도 돼요. 무서워요? 괜찮아요  나오세요"

 

내 목소리는 완전 애기말투에 우쭈쭈 말투가 됐다. 수의사쌤이 날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아. 내가 애교를 부리고 있었구나. 진짜 나도 몰랐다.

수의사쌤의 뜨악한 눈으로 나를 보니 다시 정신을 가다듬는다. 다시 정상적인 여자의 어투로 돌아왔다. 톤도 낮아졌다.

 

"제 고양이가 아직 몇개월 안되서요. 애기에요."라고 수습을 한다. 정상적인 여자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퇴근하고 집에 오면 고양이한테 엄청 애교를 부린다. 새삼 깨닫는다.

 

"고양이야~~ 나 집에 와쬬오오오~ 잘 있었오오오??" 라고 말하면서 마중 나와 있는 고양이를 안아서 쓰다듬어 준다.

"고양이야아아~ 나 넘 힘들어쬬오오오오 잘있었어요??? 뭐해떠여??? " 라고 한다. 고양이는 머리를 부빈다. 대답은 안하지만.

 

마치 어린 애기를 키우는 엄마들이 아가를 보면서 애기처럼 "우리 애기 밥먹어떠요?? 왜 이렇게 이뽀요?"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 같다.

그 엄마들도 애기를 대하고 있으니 애기처럼 된다. 나는 동물을 대하는데 왜 ..그렇지?

 

 

여튼 집에 혼자 있고 고양이랑 둘이 있으니까 그런건 상관이 없다. 고양이는 침묵의 사나이니까 내가 애교를 부린다는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다.

동물병원 갈 자꾸 정신을 놓는다. 수의사쌤은 동물을 환자로 대한다. 사무적이다. 다만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나랑 비슷한 것 같다.

 

직원들도 고양이를 끌어안고 한껏 귀여운 목소리로 "우리 이쁜 고양이~~~말잘듣쬬오~~ 이리오세요오~~몸무게 재야대요오~~" 말을 건넨다. 나랑 별 다를 게 없다.

 

내 고양이는 침묵쟁이다. 예쁜 애기 고양이한테는 누구나 애교부리게 되나보다.  내가 이렇게 다정해지는 때는 고양이를 상대할 때 뿐이긴하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생명체는 고양이랑 나랑 둘뿐이니. 난 고양이 앞에서 나를 내보인다.귀여운 고양이야. 우쭈쭈.

 

 

 

 

 

 

고양이가 말썽을 피웠다. 얼마전 새로 노트북을 샀다. 동생이 다니는 회사의 임직원 몰에서 20만 원 정도 싸게 구입했다.

 

싸게 구입해서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내 노트북의 자판기 위에 마우스가 끼어져 있었고 뚜껑이 덮였다. 그냥 살짝 덮어져 있었다.

 

그 위로 고양이가 점프를 해서 올라갔다. 노트북 사이에 끼인 마우스와 고양이의 무게 덕분에 노트북 액정이 박살났다.

 

 

서비스센터에 가서 보니 수리비가 20만 원이 나왔다. 결국 제값에 노트북을 사게 된 셈이다.

 

아 나의 사랑하는 고양이. 고양이 덕분에 20만 원이 날라갔다. 그러나 뭐 화는 나지 않았다. 나는 무한대적 관용을 품고 있다. 고양이가 뭔 짓을 해도 나는 고양이를 용서한다.

 

 

고양이는 말썽을 조금씩 피운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까 청소기가 하루종일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거나.. 갑자기 세탁기가 혼자서 세탁을 하고 있다거나..

 

집에 있는 화분의 잎사귀나 꽃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고 화분이 박살나서 깨져있다.. 그릇들은 깨져서 유리조각으로 변해있다거나 등등..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는 분노같은 것은 없다. 그냥 '고양이야. 왜 그랬어. 귀찮다. 치우기 너무 귀찮아.'라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고양이를 사랑하고 있는데 가끔 내 사랑에 내가 놀란다. 고양이에게 한없는 애정과 관용을 보여주는 내 마음이 놀랍다. 어쩌면 이렇게 짜증도 안내고 화도 안내고 '그러려니' 할 수 있는 걸까.

 

 

내 자신에게도 나는 화를 자주 내고. 또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화를 내며..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한테도 짜증이 나는데.

 

내 마음에 둥둥 떠다니는 작은 사랑의 조각은 고양이에게로 모아진다. 나의 흩어져 있는 사랑의 조각은  고양이한테 모아져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배려와 관용이 생기게 된다.

 

어쩌면 내 사랑의 조각들은 내 마음의 귀찮음과 배려없음 짜증과 분노로 차있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집에 오면 비로소 얻게 되는 평화로 사랑의 조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나의 사랑에 내가 가끔 감동을 한다. 감동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미움도 없애보려고 노력한다. 고양이의 실수는 관용하면서 나 자신을 비롯한 타인의 실수에는 예민하지 말자고. 뭐 그런 다짐을 해보는 것이다.

 

 

내 고양이는 특이한 버릇이 있다. 왼쪽 앞발을 안으로 집어 넣는 것이다. 생후2개월부터 그랬다.

 

이 특이한 버릇은 내가 발견한 것이 아니다. 한 친구가 발견해줬다. 이 친구는 우리 집에 놀러와서 나랑은 안 놀고 고양이랑만 두어시간을 놀더니 이 버릇을 발견했다.

 

내 고양이의 특이한 포즈를. 고양이는 왼쪽 발을 안으로 집어넣는다.

 

왼쪽 발을 안에 집어넣는 고양이.

 

그 버릇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내가 억지로 고양이의 왼발을 밖으로 빼어 놔도 다시 집어넣는다. 건강상 문제는 없어보이니 냅두기로 한다. 이것도 내 고양이의 취향이겠지.

 

내 친구는 고양이랑 놀더니 집에 가기 매우 싫어했다. 친구는 이윽고 고양이를 사랑하게 됐다. 그 다음날 마트에 가서 간식거리를 잔뜩 사갖고 또 놀러왔다. 나랑은 안놀고 "이모가 또왔어. 고양이 안녕?" 말을 걸면서 고양이랑만 논다.

 

사진이랑 동영상도 잔뜩 찍어갔다.

 

왼쪽 발을 숨긴 고양이.

 

다른 친구도 우리집에 놀러와서는 고양이에게만 시선을 고정한다. 고양이 간식을 또 사와서 고양이의 환심을 얻으려고 한다. 나랑도 놀기는 했는데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처음 보면 너무 귀엽다. 발로 세수하는 것도 귀엽고. 사냥 본능이 나와서 장난감을 사냥하려는 것도 귀엽다.

 

 

나도 고양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 넋을 놓고 바라봤다. 너무너무 예뻐서. 왜 만화영화에 고양이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장난감도 엄청 많이 사고 사냥놀이도 엄청 자주 했다.

 

불을 꺼놓고 그림자 놀이도 하고. 그림자를 쫓아다니는게 너무 귀여웠다. 그런데 이제는 고양이가 노는 모습을 보는게 너무 익숙해져서 차라리 웃긴 포즈를 취하는게 더 웃기다. 웃긴 얼굴, 웃긴 행동 이런거 보는게 더 웃겨서 혼자서 깔깔 댄다.

 

아니 왜 이러고 있는거야?

 

고양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나도 좋고 친구들도 좋아하는 만큼 고양이 카페도 생기는 거고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사람들도 생기는 거겠지? 유튜브에서도 고양이 동영상이 인기가 많은 것일 테고.

 

나도 고양이의 귀여운 순간들을 사진속에 잔뜩 담아놨다. 고양이는 진짜 너무 귀엽다. 귀여워. 왜 그렇게 귀여울까 고양이는? 동물 중에서 제일 귀여운 것 같다. 그리고 내 고양이가 세계에서 제일 귀엽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양이야 얼음땡하는거야?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마리아 스바르보바 전시회,

일요일 저녁에 갔다.

생각보다 사람이 적어서 좋았다.

사진이 그림처럼 보인다.

명암과 그림자가 거의 없고

색깔도 질감처리가 거의 없이

유화같은 느낌이다.

대구와 대조가 잘 어울리고

파스텔 톤에 원색의 포인트가 들어가는

사진이 많다.

네모네모한 느낌이고

사람들이 비슷한 옷을 입고 있어서

공산주의를 패러디하는 모습이다.

굿즈의 소장욕구가 좀 있었지만

아주 끌리는 굿즈들은 없었다.

스바르보바는 슬로바키아 출신의 사진가다.

핫셀블라드 마스터스 예술부문에서 우승,

국제사진공모전에서 수상,

스바르보바 사진은,

차가우면서 따뜻하고

과거적이면서 미래적, 초현실적이라는 느낌이다.

색감 표현도 유명하다.

수평과 수직이 두드러지는 미니멀한 공간에 인물이 등장하는데,

모두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이다.

작품 속 공간이나 소품은 냉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체제에서 만들어졌다.

내 '집돌이'고양이는 집만 엄청 좋아한다. 내 생각에는 하루종일 집에만 있으면 너무 심심할 것 같아 보인다. 밖에도 나가고 바람도 쐬고 새로운 곳도 구경하는게 재밌지 않을까?

 

 

"고양이야. 집에만 있으면 너무 심심하지 않니? 밖에 나가볼래?"라고 고양이한테 말을 걸었지만 고양이는 "너무너무너무너무 싫어"라고 말할 뿐이다.

 

고양이를 데리고 나가보려고 했다. 고양이를 안고 현관문을 나서자 고양이가 겁에 질려버렸다. 편안히 안겨있다가 갑자기 두발로 내 어깨를 꽉 잡는다.

 

 

고양이는 낯선곳이 무섭다. 낯선 소리에도 예민하다.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너무 무서워하면서 내 어깨를 꽉 잡고 내 품에 파고든다.

 

고양이는 집안이 제일 좋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밖에 산책을 같이 나가려는 꿈은 접었다. 고양이는 그냥 집에만 있어도 안심심하다고 한다. 내 예상과는 다르지만.

 

 

그래서 집돌이 고양이한테 집에만 있어도 좋을 수 있도록 캣타워를 사줬다. 그런데 망한 것 같다. 고양이가 캣타워에 비해 생각보다 너무 크고 무언가 불편한지 캣타워에 스스로 올라가지 않는다.

 

올라가기에는 뭔가 불편한게 틀림없다. 고양이가 너무 좋아서 선물을 줬건만 고양이는 여전히 내 책상의자에만 앉아있다.

 

고양이가 너무 크다.

 

고양이의 관성도 정말 대단하다. 딱 정하면 그곳만 좋아하는 고양이의 관성.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책상의자에만 앉아있을까.

 

고양이의 관성이 그렇게 대단하면 사실 좋은 것 같다. 고양이가 나를 딱 집사로 정해서 나만 졸졸 쫓아다니니까 관성 그대로 죽을때까지 나만 쫓아다니겠네. 그렇게 생각하니 그건 너무 좋다.

 

매일 나랑 같이 지내는 고양이이지만 꿈에서까지 고양이가 나왔다. 고양이의 이름은 밍밍이였다.

 

"밍밍아. 밍아. 밍밍아." 나는 고양이를 애타게 불렀다. 사랑하는 밍밍이.

 

밍밍이는 그루밍을 열심히 했다. 밍밍이가 내 앞에서 똑같이 애교를 부렸고 나는 밍밍이를 사랑했다. 꿈에서 일어나보니 내 고양이가 발 밑에서 자고 있다.

 

무슨 자세이니 이건?

 

잠에서 일어난 나는 고양이를 불러봤다. "밍밍아. 밍아. 네 별명은 이제부터 밍밍이야. 왜냐면 꿈에서 네가 밍밍이였거든." 밍밍이는 내 손을 핥는다.

 

그렇게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된 밍밍이. 나는 꿈에서까지 고양이와 함께 논다.

 

고양이의 전체적 실루엣과 그냥 그 어떤 모습들. 내 사랑인 고양이.

내 무의식은 고양이에게 별명까지 지어줬다. 난 무의식까지 고양이가 좋다.

 

 

 

꿈에서 동생이 거제도로 내려갔다. 시골 분위기에서 살고 싶은 동생의 바람이 내 꿈에서 이뤄졌다.

현재 동생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서울 토박이로 서울에서 오래 살다가 시골에 위치한 대기업에 입사했다. 시골에 있다보니 서울 분위기가 여태까지는 그렇게 숨막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나도 지방에 몇 개월 있어봐서 무슨 얘기인지 대충은 알 것 같다.

 

서울 광화문 부근에서.

 

서울은 사람들이 아주 빠르게 걸어다니고 분위기도 삭막하다. 말도 용건만 간단히 하고 사담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는다. 지방에서는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서로 인사를 하고 물건을 살 때도 사담을 비교적 많이 나누는 편이다.

 

제주도 어느 집.

 

동생은 더욱 한가로운 도시로 이사하고 싶어한다. 바다가 있는 제주도라든가. 밤이 되면 가로등만 남겨진 채 깜깜한 어떤 시골에 집을 짓고 살고 싶은 것이다. 그 집은 서울보다 싸기 때문에 넓은 정원도 있을 것이고, 돌담으로 낮은 경계를 세워놓았을 것이다.

 

 

바람이 훅 불어 들어오면 미세먼지는 없는 깨끗한 공기를 마실수도 있을 것이다. 소금기가 짭짤해서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 얼굴을 조금 찡그리게 되는 바람일 거다. 

 

집은 어느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처럼 한쪽에는 카페같은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아늑하게 앉아서 천천히 차를 한잔 마실테지.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운 내 고양이는 창틀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우리들을 쳐다보다가 꾸벅꾸벅 졸테고.

 

 

제주도에 살게 된다면 서울에서의 삶과는 다르겠지? 서울에서는 무엇인가를 계속 성취하는 데 탁월한 도시라면 제주도는 일하지 않는 시간동안의 삶을 아름답게 소비할 수 있는 데 탁월한 도시일 것이다.

 

뭐 그런 바람에서 간밤의 내 꿈에서 동생은 거제도로 내려가 버렸다.

 

고양이도 델고가
 

2018년 4월 내 고양이를 데려왔다. 이제는 고양이 없는 삶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2018년 내가 제일 잘한 일이 고양이를 데려온 것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 고양이를 데려온 것. 내가 고양이를 발견한 것. 어쩜 나는 이렇게 완벽한 고양이를 발견했을까.

 

예쁘고 귀엽고 성격도 좋다. 예민하지도 않다. 사람을 좋아하고 야옹-야옹 울지도 않는다.

 삐지지도 않는다. 화도 안내고. 발톱을 잘라줘도 가만히 있는다.

 

 

문앞에서는 나를 매일 마중하러 나와있는다. 별명이 마중 고양이다.

 

잘때도 내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잔다.

 

그리고 화장실을 바꿔줘도 금방 적응한다. 사료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신다.

 

고양이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덕목을 전부 갖췄다.

 

 

요새는 귀여운 버릇도 생겼다. 내 옆에 있다가 나한테 고양이는 손을 내민다. 내 온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쑥 손을 내밀어 내 팔위에 올려놓는다. 교감하고 싶은걸까? 우리는 대화도 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왜 자꾸 손을 내미는걸까? 나의 온도를 느끼기 위한 고양이의 귀여운 몸짓이다.

 

내게 고양이는 손을 올려놓는다. "내가 옆에 있는걸 까먹지 마시게. 나는 살아있는 동물이야. 나는 체온이 따스한 생명체니까. 나를 부디 잘 돌봐줘."

 

귀여운 아가. 응 알았다. 나도 너의 말랑말랑한 젤리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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