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언니단 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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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단’ 레터가 돌아왔다! 일잘러 언니들의 2023 갓생 응원 프로젝트 일하는 언니들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유튜브 크리에이터부터 천문학자까지 다양한 직군의 여성들이 직접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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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20분 작업법⏰
하루에 몇 KMN을 하겠다고 정한다(예: 8KMN)
쪽지에 그 횟수만큼 숫자를 쓴다(예: ➀➁➂➃➄➅➆➇).
몇시든 좋으니 정각에 자리에 앉는다(예: 오전 10시).
40분 후 알려주도록 설정된 타이머를 켠다.
40분간 집중해서 작업한다.
타이머가 울리면 무조건 일어난 뒤, 1KMN을 했다고 표시한다                (예: ➊➁➂➃➄➅➆➇).
20분 쉰다.
다시 정각이 되면(예: 오전 11시) 무조건 자리에 앉는다.
4~8을 목표 횟수만큼 반복한다(예: ➊➋➌➍➎➏➐➑).
하루 일을 마감한다(예: 오후 6시).


“애걔” 싶게 간단하지요? 그렇다고 실행이 쉽진 않습니다. 이 방법은 다음 사항들을 잘 지켜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 40분+20분 작업법에서 주의할 사항 👷

1) 일할 때 철저히 집중합니다.

2) 쉴 때 철저히 쉽니다.

3) 복잡한 도구에 의존하지 마세요.

4) 가급적 정각에 시작하세요.

5) 하루에 10KMN 이상 하지 마세요.



1) 일할 때 철저히 집중하기: 40분간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저는 전화가 와도 안 받고, 문자도 확인하지 않습니다. 문자나 메일이 오면 그걸 당장 보고 답해야 할 것 같죠. 하지만 세상에 겨우 몇십분을 미룬다고 해서 큰일 날 일은 거의 없습니다. ‘도서관에 대출 연장하는 걸 깜박했네’ 하는 생각이 들면, 옆에 둔 종이에 ‘도서관 대출 연장’이라고 메모하고 넘어가세요. 메모한 순간 머릿속에서는 비워질 테고, 그 일 자체는 쉬는 시간에 하면 됩니다. 다른 문제에 대한 생각이나 활동을 조금이라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집중은 자리에 앉는다고 자동으로 되는 게 아니죠. 몸과 마음이 집중하는 데 길들도록, 한동안은 집중에 집중해야 합니다. 가령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앉았을 때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이전보다 집중하기가 어렵죠. 어려워도, 애쓰면서 40분을 지킵니다.



2) 쉴 때 철저히 쉬기: 타이머가 쉴 시간을 알리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세요. 작업 공간을 박차고 일어나서, 20분간 다른 일을 하세요. 40분간 집중하느라 굳은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어주세요. 또는 집안일을 하거나, 문자를 확인하세요. 중요한 건 반드시 쉰다는 점입니다. 사실 일이 잘될수록 중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리듬 탔을 때 더 해야 하는데’ 싶죠. 그래도 쉬어야 합니다. 일을 하루만, 일주일만, 한달만 바짝 하고 말 것이라면 좀 무리해도 되겠지요. 저도 벼락치기라면 남부럽지 않게 해봤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직업인으로서 평소의 업무를 계획하는 방법입니다. 가끔은 어렵사리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도 머릿속에 일 생각이 가득할 때가 있죠. ‘이런 사례를 끼워 넣으면 더 좋은 글이 될 것 같아’ 하는 아이디어가 하필 쉬는 시간에 떠오릅니다. 그래도 도로 앉지 마세요. 차라리 20분간 스트레칭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그 아이디어를 계속 굴리세요. 번득 무슨 생각이 들었다고 매번 도로 앉아버리면 영영 못 쉽니다. 당장 쏟아내야 할 것 같은 마음으로 쏟아낸 작업이 나중에 만족스러운 경우도 드뭅니다. 오히려 뭘 빼먹기 쉽습니다. 휴식도 애써야 합니다. 일을 했다 말았다 덜컹덜컹하는 게 아니라 고삐를 바투 쥐었다 슬쩍 풀었다 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3) 복잡한 도구에 의존하지 말 것: 요즘은 시간 관리에 특화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 아주 많습니다. ‘포레스트’ 앱처럼 집중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여 재미를 느끼게 하는 앱도 있고, 타이머/스톱워치 기능에 기록 기능을 덧붙인 앱도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최대한 단순한 타이머와 기록 도구를 쓰시라고 권합니다. 집중하려고 도구를 쓰는 것인데, 그 도구가 목적에 앞서서는 안 됩니다. ‘타이머 소리를 들으면 무조건 일어난다’ 이상으로 복잡한 인지나 조작을 요구하는 수단은 장기적으로 본말 전도가 되기 쉽습니다. 목표한 KMN 횟수를 하나씩 지워가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은 얼마든지 느낄 수 있어요. 저는 손으로 기록합니다. 메모 앱 등도 시도해봤지만, 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작업 내용까지 더 꼼꼼하게 기록해야 하는 사람은 더 세련된 도구를 써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굳이 ‘발전된’ 생산성 관리 도구를 쓰는 데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으로 쓰는 것도 기술입니다. 오래되고 검증된 기술입니다. 그보다 더 세련된 기술을 써야 할 필요가 생기면 그때 배우면 됩니다. 제 생각이지만, 수단에 필요 이상 공을 들이면 일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4) 가급적 정각에 시작할 것: 위의 3)과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굳이 정각에 시작하지 않아도 되고, 사실은 꼭 40분+20분으로 한시간 주기를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편이 흘러간 시간과 남은 시간을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건 긴 설명이 크게 와닿지 않을 테고, 직접 한번 시도해보시면 체감하실 수 있는 요소입니다.



5) 하루에 10KMN 이상 하지 말 것: 예시에서처럼 하루에 8KMN을 하면, 실질 업무 시간은 5시간 20분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하루 8시간 근무하는 회사원의 실질 업무 시간은 보통 이보다 더 짧을 겁니다. 20분의 휴식도 일한 시간으로 헤아리세요. 이 작업법은 하루의 업무를 잘 계획하기 위한 방법인 동시에 그보다 더 장기적으로 한달, 일년, 십년, 평생의 업무를 계획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오늘 12KMN을 하면 내일은 4KMN밖에 못 하기 쉽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보다는 오늘 8KMN을 하고 내일도 8KMN을 하는 식으로 고르게 가는 편이 총 시간은 같더라도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리듬입니다. 집중력도 체력이고, 체력은 화수분이 아니니까요. 

기분이 좋지 않아서 집을 나섰다. 돈이 들어있는 체크카드를 들고, 발길 가는대로 걷고 있다.

 

체크카드에는 10만 원 남짓 들어있다. 발은 매우 무겁고 불편하다. 신발이 다 떨어져서 발이 불편하다. 신발을 사고 싶다는 욕구가 내 안에서 스물 피어오른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 그 순간 매우 큰 절망감을 느꼈다. 마음 깊숙이 밀려드는 절망감은 다른 이유도 아니고 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매우 슬프다.

 

어렸을 때는 그러한 절망감이 마음 곳곳에 퍼져서 존재론적인 물음까지 확장되었다. 소비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나의 능력, 아니 부모의 능력, 그 능력을 키우지 못한 부모의 게으름, 아니 사회의 억압, 사회의 부조리까지 생각은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른이니 그런 절망감의 싹은 고개를 들다가 다시 사라져 버린다.

 

길을 계속 걷는다. 카페가 보여서 커피 4천 원에 구입한다. 따뜻한 커피를 한입 마시면서 4천 원이 내게 2시간의 행복을 선사했음을 깨달았다. 돈으로 산 따뜻한 액체는 내게 두 시간 정도의 기쁨을 준다.

 

 

커피의 맛이 더 훌륭하고, 더 따뜻하면 나는 30분은 더 행복할 것이고, 생각보다 더 맛이 없다면 30분은 덜 행복하겠지. 나는 두 시간동안 커피를 마시면서 길을 걷는다.

 

따뜻하고 쌀쌀한 하늘을 보면서, 하늘은 언제나 하늘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늘은 변화하면서도 그대로다. 이것을 볼 수 있는 나의 눈에 감사한다. 이것을 느끼면서 언어화하는 나의 생각에도 감사한다.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몸을 베풀어준 부모에게도 감사한다.

 

 

부모님께 얼른 효도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돈을 많이 버는 일이다.

 

길을 걷다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제는 공부를 하러 갈 때다.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몇 권 산다. 책을 펼쳐들어 읽는다. 책이 주는 재미와 유익은 1만3500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세계로 나를 인도하며 나의 경험세계를 넓혀준다.

 

 

또한 책에 쓰여 있는 언어의 조합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아름다움마저 준다. 몇 시간의 독서를 마치고 일어나보니 하루가 전부 갔다.

 

오늘 내 하루의 시간은 17500원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느끼면서 하루만큼의 인간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소비가 아니다. 나는 움직였고, 다짐했으며, 또한 생산성을 얻는 데 에너지를 사용하였다.

 

 

하루의 삶이었다. 돈으로 운영된 시간과 그만큼의 성장의 시간이 공존했던 인생의 하루였던 셈이다.

이렇듯 돈은 사실 사회를 움직이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돈은 목적이 아니고, 운영되는 데 필요한 수단인 셈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실제로 누릴 수 있는 힘도 개개인의 능력이자, 개성이다.

 

돈으로 운영되는 개인의 삶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 그것을 언어화하여 전달하는 표현력, 표현하며 행복을 배가할 수 있는 인맥, 인맥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주까지 말이다.

 

개인의 삶에서 느끼는 감수성으로, 행복은 퍼져 나간다. 운영되는 것은 돈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돈을 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고양이가 한마리 있다. 그 고양이는 내게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안식처를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고양이를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오늘도 돈을 번다.

 

[편집자 주: 한겨레 문화센터 온라인 백일장에서 우수상을 탔던 글입니다.]

내 고양이는 지 멋대로다. 내 기분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는다.

 

내가 기분이 안좋아서 침대에 널부러져 누워 있으면 고양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배 위에 올라온다. 정말 배짱도 좋다.

 

그러나 고양이가 부드럽게 내 위에서 골골대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고양이가 더 있기를 바라지만 고양이는 지멋대로 나를 떠난다.

 

 

"고양이야. 내게 더 있어. 이리와. 이리와서 내 옆에 있으라구. 자꾸 어딜 도망가는거야? 이리오라니까."라고 간절히 불러봐도 들은척도 안한다. 정말 배짱도 좋다.

 

정말 자기 멋대로다. 고양이는 자신이 오고 싶을 때 내게 오고 충분히 만족했으면 내 기분 따위는 신경도 안쓰고 그저 떠나버린다.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고양이야. 네가 모르는 게 있는 모양인데. 네 밥이랑 물이랑 다 내가 주는거야. 너의 똥도 내가 치워주는 거란다. 고양이야. 밖에는 매우 추워. 집에 있으니까 따뜻한건지는 알고 있니? 너 내가 쫓아내면 어떻게 살려고 이렇게 배짱 좋게 굴어?" 라고 말을 걸었으나

 

고양이는 "그게 무슨 대수냐. 나는 네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거란 말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얼굴은 여전히 귀엽게 표정을 짓고서는

 

 

정말 어이가 없다. 이렇게 배짱 좋은 녀석을 다 봤나. 고양이의 배짱을 보면서 사실 내가 겹쳐 보였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쟤는 참 배짱도 좋아. 지 신경질을 있는대로 다 부리고. 밥 안먹겠다 뭐 안하겠다 투정 부리고. 참 배짱도 좋아. 지가 먹는거 입는거 자는데 다 우리가 준 건데."

 

"꼭 맡겨놓은 것처럼 당당하게 구는 저 배짱은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내 딸은 부모 마음 같은건 생각도 안하고 기분도 안살피고 지 하고 싶은대로 하는데 참. 저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내 배짱은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건 뭔가 태어날 때부터 알았던 본능이랄까. 내 부모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겠지 하는 마음.

 

그러나 철이들고 나이가 들면서 청소년기, 방황하던 시절의 내가 객관적으로 보인다. "너는 정말 배짱도 좋아. 마음에 안들고 짜증이 나면 그걸 다 표현하고. 네가 여태까지 살아온게 누구 덕인줄도 모르고. 정말."

 

내 고양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내 노트북도 망가뜨린 주제에. 지 마음대로 하고 있는 고양이를 보면서 나는 왠지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졌다.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를 엄마 아빠는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미워하고 싫어한다. 

 

엄마 아빠는 고양이를 자주 갖다가 버리라고 한다. 냄새도 나고 털도 날리고. 똥에서도 냄새가 난다고 한다. 나한테도 몸에서 고양이 냄새가 난다고 싫어한다. 내가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질색을 한다. 

 

고양이가 엄마아빠한테 다가가면 질색을 하면서 저리 치우라고 한다. "이리 못오게 해! 갖다 버리지 왜 계속 키우냐? 쓸데없는 것."

 

 

아빠는 종종 내게 "너한테 냄새가 나. 사람들이 너한테 말을 안하는거지. 너한테 몸에서 지독한 고양이 냄새가 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한국어를 할줄 몰라 다행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 옆에서 식빵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너무나도 얌전한 고양이다. 

 

고양이는 아무소리도 듣지 못해서 얌전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고양이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있다.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불쌍한 고양이. 말을 할 줄 몰라 어찌나 다행인지. 

 

 

내가 관심이 있는 것, 내 관심이 모인 곳, 내 사랑을 쏟는 곳에 타인이 무관심한다든가 아무런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화가 난다. 

 

내 사랑스러운 고양이인데 어찌 이렇게 사랑하지 않고 싫어할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일 뿐이다. 그 사람이 꼭 내 고양이를 사랑해야하는가? 아니 전혀. 그 사람 마음이지. 내 고양이는 내가 사랑하니까 그걸로 됐다. 

 

내가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쓰릴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 사람 탓인가? 아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인간은 지구상에 아빠가 유일하다. 내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한다. 누구도 내 아빠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빠는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을 극혐하지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캣타워를 조립해줬다. 아빠는 고양이는 매우 극혐하지만 나를 매우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니 캣타워를 조립해준다. 그것이 어떤 용도인지도 알지만 기꺼이 해준다. 

 

 

아빠는 나를 싫어하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면 슬플 거다. 그러나 나를 싫어하는 인간은 자기 마음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사랑은 오직 아빠의 것이다. 누구도 날 그만큼이나 사랑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경중이 있다. 경중. 무겁고 가벼운 것.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내 살길은 내가 헤쳐나가는 것이고, 내가 맡은 일은 내가 해내야 한다. 

 

돈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나를 위해서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상황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아주 오랫동안. 존재론적 질문까지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삼킬듯이 읽었다. 책의 문장, 그리고 작가의 생각들을 다 삼켜버릴 듯이 아주 오랫동안 탐독을 했다. 

 

작가들은 대개 생각이 깊고 아주 유연하다. 아주 유연하고 세심하다. 나는 그 문장에서 위로받았다. 나는 날마다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날마다 글을 썼다. 

 

나는 괴로웠다.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27세에 죽어버린 수많은 아티스트같이 인생을 끝장내버리고 싶었다. 아침이 뜨면 해가 떠서 괴로웠고 마음은 아주 슬픔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내 인생 전부였다. 그뿐이었다. 오로지 내 낙은 책 읽는 것, 그리고 먹는 것이었다. 

 

아주 깊은 우울에 잠겨서 아주 깊은 슬픔과 함께 . 그렇게 지냈던 인생은 언제 끝났던가. 어떻게 끝났었지. 그건 어떤 한 남자때문이었다. 

 

 

 

중학교 2학년 어느날. 같이 다니던 친구가 말했다.

 

지금 나는 너무좋아. 거의 완벽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 행복이 깨질까봐 두려워.

 

나는 전혀 공감이 안됐다. 중학교2학년 시절, 지금이 너무 좋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고 또 그런 생각은 해본적도 없었다.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그 때 내 가장 큰 고민은 양아치들과 같은반인게 괴롭다는 것이었다. 그 양아치 애들은 툭하면 아이들을 괴롭혔는데. 물론 나를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게 늘 불안했다. 혹시 이들과 틀어져 홀로 남게 되면 저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게 무서웠다.

 

어흥.

그 양아치 애들은 반에서 제일 친구가 없고 힘없고 말도 잘 못하는 애들을 괴롭혔다. 여자중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로 차고 때리고 책상위를 어지럽히고 가방을 훼손했다.

 

그 양아치 무리 가운데 한명이 밉보였던 것 같다. 그 한 명은 같은 무리였다가 갑자기 왕따신세로 전락하더니 집단으로 폭행을 당한 모양이었다. 학교에 팔에 깁스를 한채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무리들 가운데 몇몇은 학교 봉사를 받았고 정학을 받기도 했고, 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도망치듯이 전학을 가버렸다. 그런 살벌한 정글이 내 학교 생활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지금은 그냥 저냥 괜찮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지만 갑자기 여기에서 떨어져 나가면 저들의 먹잇감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늘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서운 고양이 눈.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인데 3학년 언니들 가운데 몇몇은 되게 위협적으로 우리반에 와서 양아치무리들을 끌고 가기도 했다. 무서웠다. 학원을 다녔는데도 학원에서도 같은 반이나 학원안에 양아치 애들이 있어서 어딜가나 안심되지는 않았다. 늘 조심해야했다. 찍히지 말자. 최대한 조용히.

 

그들이 얼른 상고나 공고에 가버리고 나는 빨리 일반고에 가서 영영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하지도 않았고 무리에 소속돼있는 것이 그나마 내게 울타리였다.

 

행복한 고양이.

내 친한친구는 무엇이 행복했던 걸까. 뭐가 행복한데 ? 내 물음에 친구는 말했다.

 

너랑 다른 친구들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있고 엄마아빠랑도 좋아.

그냥 다 좋아. 다만 이게 깨질까봐 두려워.

 

그녀는 되게 어른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친구의 말이 지금 생각난 건 설날에 나홀로 지내면서 집을 정리하고 놀고 내 고양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다. 너무 좋은 생각이 들면 이것이 깨질까봐 살짝은 두려운 것이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었겠지 그 아이도.

 

귀여워
 

자그마치 6일이다. 내게는 6일의 자유시간이 있었다.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는 '휴가 강박증'을 안고서 호텔을 예약했다. 그래 호캉스를 해보자.

 

깔끔한 침실. 깔끔한 베게. 누리끼리하지도 않은 완벽한 흰색의 침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져있다. 머리카락 한올이 없는 깔끔한 침실에 누워있자니 상쾌하다.

 

내가 머문 호텔.

고양이는 생각도 안난다. 해야할 의무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내게는. 방마저 내게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집에서는 방에 누워 있자면 이곳 저곳에서 요란한 소리를 낸다.

 

머리카락을 치워줘. 베게 커버를 빨아줘. 침대보를 바꿔줘. 고양이털을 치워줘. 양말 속옷을 빨아줘..

 

할 일이 잔뜩 쌓인 방에서 벗어나 있자니 마음이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은 깃털이다. 고양이는 생각도 안난다. 잘 지낼거야. 내 고양이는. 내가 밥이랑 물 잘 주라고 신신당부 했으니.

 

고양이는 매우 잘 지냈다.

나는 나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 자신을 깊숙히. 나는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가 열심히 무언가를 메모한다. 나는 내 행동을 찬찬히 살핀다.

 

나는 무언가 생각이 나면 열심히 적는 인간이었어. 그런 뒤에는 그것을 바로 해치우지. 안그러면 숙제가 남은 것 같거든.

 

나는 며칠 동안을 나와 깊숙히 대화했다. 내가 어떤 마음이 드는지 어떤 사고의 회로로 결정을 내리는지.. 나와의 데이트가 지겨워졌을 때 쯤.. 집으로 돌아왔다.

 

 

내 불쌍한 아기 고양이는 나를 마중나와있다. 언제나처럼 내 앞에 얌전히. 나는 고양이를 꽉 껴안고 고양이의 털을 만진다. 정말 오랜만이다.

 

고양이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이런 느낌을 가지겠구나. 싶다. 이런 부드러운 털과 따뜻한 생명체.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저 모습. 고양이를 껴안고는 마구마구 쓰다듬는다.

 

내 손의 감각이 고양이를 잊어버린 것 같다. 고양이를 계속 기억하려고 나는 고양이를 계속 쓰다듬었다.

 

나를 만져줘..

 

 

 

고양이의 배변실례는 5일 만에 막을 내렸다. 나는 내 방을 화장실로 사용하는것이 항의의 표시인 것을 깨닫고 급격하게 화해 모드로 들어갔다.

 "미안하다. 아가야. 너를 앞으로 방안에 가두지 않을게."

 

사과를 하고 간식을 주고 쓰다듬고. 계속 계속 그랬다. 고양이가 화가 풀린 모양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날부터 화장실에 제대로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화장실 3개를 전부 다 이용한다. 참.. 신기하고 영리하다. 고양이가 바보인줄 알았는데. 고양이는 영리하다.

 

반려동물이 왜 '애완동물'이 아닌 줄 깨달았다. 동물도 생명이라서. 그들도 원하는 것이 있고 불만도 있고 삐지기도 하고. 화도 낸다. 정말 신기하다.

 

내 고양이는 의사표현을 명확하게 한다. 쓰다듬 당하고 싶으면 내게 오지만 충분하면 저리 간다. 그럼에도 계속 쓰다듬으면 살짝 문다.

 

고양이가 조금 싫어질 뻔 했다가 이해하고 나니 다시 좋아졌다. 나도 고양이의 사랑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고양이만 내 마음에 들어서 집에 온 것이 끝이 아니다.

 

그런 관계로 살아가야 해서 '반려동물'인가보다.

 

 

그리고 내 고양이가 방광염에 안걸린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친구는 이 스토리를 듣더니 내 고양이를 칭찬했다.

 

  "고양이야. 투쟁하길 잘했다. 덕분에 네 복지가 좋아졌구나. 앞으로 불쌍한 집사랑 사이좋게 살아라."

 

 

고양이가 내 방에 오줌을 누는 행위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3일이 넘어갔다.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고양이가 처음으로 조금씩 싫어지기 시작했다.

 

동물병원에서는 "방광염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증상만 보면 아주 초기 증상이라고. 방광염 보조제를 먹이기로 했다. 고양이는 워낙 비뇨기과 질환에 자주 걸린다고 한다.

 

 

내 고양이는 내 방에 있는 창가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한다. 높은 데다가 바깥도 볼 수 있고. 내 모습도 보이니까.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항상 창가에 앉아있는데. 문제는 그 자리에서 바닥으로 오줌을 갈긴다. 바닥에 냄새가 벤 모양이다. 이제 내 방이 화장실이 될 위기에 처했다.

 

나는 세척제를 구입하고 방에 뿌리는 향기를 내는 액체도 구입했다. 화장실도 종류별로 사다 놓고. 모래도 종류별로 사다놨다.

 

화장실에 벤토모래를 깔아놓고 그 앞에는 배변매트를 쫙 깔았다. 이 가운데 딱 하나만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었다.

 

 

이 모든걸 하기 위해 나는 본격적으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청소를 하려고 하는데 이 녀석이 자꾸 돌아다니고 난리를 친다. 냉전중인만큼 나는 고양이를 혼냈다.

 

"가만있어!"

 

물론 귓등으로도 안듣는다.

 

점점 화가 나니 고양이를 들고 작은방에 넣었다. 이곳은 들어간적도 없고 오줌 냄새도 없는 데니까 얌전히 있겠지? 싶었다. 청소를 좀 하다가 3분 정도 지났을까. 너무 조용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방문을 보았다.

 

 

세상에. 오줌을 갈기고 있다. "너.. 오줌 싸는데 힘들었던 방광염 걸린 고양이 아니었니?"

 

 "너 방광염 걸린 것 같다고 내가 무려 20만 원이나 들여서 치료를 해준 것 같은데.."

 

오줌을 왜 이렇게 잘싸는거니. 생각을 해보니 이건 항의의 표시인 거다. 항의다.

 

반발이다! "나를 이 방에 가둬놓지 말아라 집사야!" 고양이의 오줌이 그런 의미였다는 걸 알았다.

 

 

생각을 해보니. 그렇다.. 처음 오줌을 내방에 갈긴 날도. 내가 밥먹는데 자꾸 와서 킁킁대니. 오지말라고 방안에 넣어둔 바로 그날인 것이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그날 항의했다.  무려 5일간이나.

 

고양이가 완벽하게 이겼다. 고양이의 5일 농성으로 얻은 것.

 

"여러개의 화장실"

 "좋은 벤토모래"

 "새로운 좋은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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