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나랑 같이 지내는 고양이이지만 꿈에서까지 고양이가 나왔다. 고양이의 이름은 밍밍이였다.

 

"밍밍아. 밍아. 밍밍아." 나는 고양이를 애타게 불렀다. 사랑하는 밍밍이.

 

밍밍이는 그루밍을 열심히 했다. 밍밍이가 내 앞에서 똑같이 애교를 부렸고 나는 밍밍이를 사랑했다. 꿈에서 일어나보니 내 고양이가 발 밑에서 자고 있다.

 

무슨 자세이니 이건?

 

잠에서 일어난 나는 고양이를 불러봤다. "밍밍아. 밍아. 네 별명은 이제부터 밍밍이야. 왜냐면 꿈에서 네가 밍밍이였거든." 밍밍이는 내 손을 핥는다.

 

그렇게 새로운 별명을 얻게 된 밍밍이. 나는 꿈에서까지 고양이와 함께 논다.

 

고양이의 전체적 실루엣과 그냥 그 어떤 모습들. 내 사랑인 고양이.

내 무의식은 고양이에게 별명까지 지어줬다. 난 무의식까지 고양이가 좋다.

 

 

 

꿈에서 동생이 거제도로 내려갔다. 시골 분위기에서 살고 싶은 동생의 바람이 내 꿈에서 이뤄졌다.

현재 동생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서울 토박이로 서울에서 오래 살다가 시골에 위치한 대기업에 입사했다. 시골에 있다보니 서울 분위기가 여태까지는 그렇게 숨막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나도 지방에 몇 개월 있어봐서 무슨 얘기인지 대충은 알 것 같다.

 

서울 광화문 부근에서.

 

서울은 사람들이 아주 빠르게 걸어다니고 분위기도 삭막하다. 말도 용건만 간단히 하고 사담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는다. 지방에서는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서로 인사를 하고 물건을 살 때도 사담을 비교적 많이 나누는 편이다.

 

제주도 어느 집.

 

동생은 더욱 한가로운 도시로 이사하고 싶어한다. 바다가 있는 제주도라든가. 밤이 되면 가로등만 남겨진 채 깜깜한 어떤 시골에 집을 짓고 살고 싶은 것이다. 그 집은 서울보다 싸기 때문에 넓은 정원도 있을 것이고, 돌담으로 낮은 경계를 세워놓았을 것이다.

 

 

바람이 훅 불어 들어오면 미세먼지는 없는 깨끗한 공기를 마실수도 있을 것이다. 소금기가 짭짤해서 코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 얼굴을 조금 찡그리게 되는 바람일 거다. 

 

집은 어느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처럼 한쪽에는 카페같은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아늑하게 앉아서 천천히 차를 한잔 마실테지.

그리고 여전히 아름다운 내 고양이는 창틀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우리들을 쳐다보다가 꾸벅꾸벅 졸테고.

 

 

제주도에 살게 된다면 서울에서의 삶과는 다르겠지? 서울에서는 무엇인가를 계속 성취하는 데 탁월한 도시라면 제주도는 일하지 않는 시간동안의 삶을 아름답게 소비할 수 있는 데 탁월한 도시일 것이다.

 

뭐 그런 바람에서 간밤의 내 꿈에서 동생은 거제도로 내려가 버렸다.

 

고양이도 델고가
 

2018년 4월 내 고양이를 데려왔다. 이제는 고양이 없는 삶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2018년 내가 제일 잘한 일이 고양이를 데려온 것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 고양이를 데려온 것. 내가 고양이를 발견한 것. 어쩜 나는 이렇게 완벽한 고양이를 발견했을까.

 

예쁘고 귀엽고 성격도 좋다. 예민하지도 않다. 사람을 좋아하고 야옹-야옹 울지도 않는다.

 삐지지도 않는다. 화도 안내고. 발톱을 잘라줘도 가만히 있는다.

 

 

문앞에서는 나를 매일 마중하러 나와있는다. 별명이 마중 고양이다.

 

잘때도 내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잔다.

 

그리고 화장실을 바꿔줘도 금방 적응한다. 사료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신다.

 

고양이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덕목을 전부 갖췄다.

 

 

요새는 귀여운 버릇도 생겼다. 내 옆에 있다가 나한테 고양이는 손을 내민다. 내 온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쑥 손을 내밀어 내 팔위에 올려놓는다. 교감하고 싶은걸까? 우리는 대화도 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왜 자꾸 손을 내미는걸까? 나의 온도를 느끼기 위한 고양이의 귀여운 몸짓이다.

 

내게 고양이는 손을 올려놓는다. "내가 옆에 있는걸 까먹지 마시게. 나는 살아있는 동물이야. 나는 체온이 따스한 생명체니까. 나를 부디 잘 돌봐줘."

 

귀여운 아가. 응 알았다. 나도 너의 말랑말랑한 젤리가 좋아.

 

 

내 고양이는 지 멋대로다. 내 기분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는다.

 

내가 기분이 안좋아서 침대에 널부러져 누워 있으면 고양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배 위에 올라온다. 정말 배짱도 좋다.

 

그러나 고양이가 부드럽게 내 위에서 골골대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고양이가 더 있기를 바라지만 고양이는 지멋대로 나를 떠난다.

 

 

"고양이야. 내게 더 있어. 이리와. 이리와서 내 옆에 있으라구. 자꾸 어딜 도망가는거야? 이리오라니까."라고 간절히 불러봐도 들은척도 안한다. 정말 배짱도 좋다.

 

정말 자기 멋대로다. 고양이는 자신이 오고 싶을 때 내게 오고 충분히 만족했으면 내 기분 따위는 신경도 안쓰고 그저 떠나버린다.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고양이야. 네가 모르는 게 있는 모양인데. 네 밥이랑 물이랑 다 내가 주는거야. 너의 똥도 내가 치워주는 거란다. 고양이야. 밖에는 매우 추워. 집에 있으니까 따뜻한건지는 알고 있니? 너 내가 쫓아내면 어떻게 살려고 이렇게 배짱 좋게 굴어?" 라고 말을 걸었으나

 

고양이는 "그게 무슨 대수냐. 나는 네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거란 말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얼굴은 여전히 귀엽게 표정을 짓고서는

 

 

정말 어이가 없다. 이렇게 배짱 좋은 녀석을 다 봤나. 고양이의 배짱을 보면서 사실 내가 겹쳐 보였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쟤는 참 배짱도 좋아. 지 신경질을 있는대로 다 부리고. 밥 안먹겠다 뭐 안하겠다 투정 부리고. 참 배짱도 좋아. 지가 먹는거 입는거 자는데 다 우리가 준 건데."

 

"꼭 맡겨놓은 것처럼 당당하게 구는 저 배짱은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내 딸은 부모 마음 같은건 생각도 안하고 기분도 안살피고 지 하고 싶은대로 하는데 참. 저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내 배짱은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건 뭔가 태어날 때부터 알았던 본능이랄까. 내 부모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겠지 하는 마음.

 

그러나 철이들고 나이가 들면서 청소년기, 방황하던 시절의 내가 객관적으로 보인다. "너는 정말 배짱도 좋아. 마음에 안들고 짜증이 나면 그걸 다 표현하고. 네가 여태까지 살아온게 누구 덕인줄도 모르고. 정말."

 

내 고양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내 노트북도 망가뜨린 주제에. 지 마음대로 하고 있는 고양이를 보면서 나는 왠지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졌다.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를 엄마 아빠는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미워하고 싫어한다. 

 

엄마 아빠는 고양이를 자주 갖다가 버리라고 한다. 냄새도 나고 털도 날리고. 똥에서도 냄새가 난다고 한다. 나한테도 몸에서 고양이 냄새가 난다고 싫어한다. 내가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질색을 한다. 

 

고양이가 엄마아빠한테 다가가면 질색을 하면서 저리 치우라고 한다. "이리 못오게 해! 갖다 버리지 왜 계속 키우냐? 쓸데없는 것."

 

 

아빠는 종종 내게 "너한테 냄새가 나. 사람들이 너한테 말을 안하는거지. 너한테 몸에서 지독한 고양이 냄새가 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한국어를 할줄 몰라 다행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 옆에서 식빵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너무나도 얌전한 고양이다. 

 

고양이는 아무소리도 듣지 못해서 얌전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고양이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있다.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불쌍한 고양이. 말을 할 줄 몰라 어찌나 다행인지. 

 

 

내가 관심이 있는 것, 내 관심이 모인 곳, 내 사랑을 쏟는 곳에 타인이 무관심한다든가 아무런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화가 난다. 

 

내 사랑스러운 고양이인데 어찌 이렇게 사랑하지 않고 싫어할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일 뿐이다. 그 사람이 꼭 내 고양이를 사랑해야하는가? 아니 전혀. 그 사람 마음이지. 내 고양이는 내가 사랑하니까 그걸로 됐다. 

 

내가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쓰릴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 사람 탓인가? 아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인간은 지구상에 아빠가 유일하다. 내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한다. 누구도 내 아빠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빠는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을 극혐하지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캣타워를 조립해줬다. 아빠는 고양이는 매우 극혐하지만 나를 매우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니 캣타워를 조립해준다. 그것이 어떤 용도인지도 알지만 기꺼이 해준다. 

 

 

아빠는 나를 싫어하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면 슬플 거다. 그러나 나를 싫어하는 인간은 자기 마음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사랑은 오직 아빠의 것이다. 누구도 날 그만큼이나 사랑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경중이 있다. 경중. 무겁고 가벼운 것.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내 살길은 내가 헤쳐나가는 것이고, 내가 맡은 일은 내가 해내야 한다. 

 

돈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나를 위해서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상황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아주 오랫동안. 존재론적 질문까지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삼킬듯이 읽었다. 책의 문장, 그리고 작가의 생각들을 다 삼켜버릴 듯이 아주 오랫동안 탐독을 했다. 

 

작가들은 대개 생각이 깊고 아주 유연하다. 아주 유연하고 세심하다. 나는 그 문장에서 위로받았다. 나는 날마다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날마다 글을 썼다. 

 

나는 괴로웠다.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27세에 죽어버린 수많은 아티스트같이 인생을 끝장내버리고 싶었다. 아침이 뜨면 해가 떠서 괴로웠고 마음은 아주 슬픔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내 인생 전부였다. 그뿐이었다. 오로지 내 낙은 책 읽는 것, 그리고 먹는 것이었다. 

 

아주 깊은 우울에 잠겨서 아주 깊은 슬픔과 함께 . 그렇게 지냈던 인생은 언제 끝났던가. 어떻게 끝났었지. 그건 어떤 한 남자때문이었다. 

 

 

 

중학교 2학년 어느날. 같이 다니던 친구가 말했다.

 

지금 나는 너무좋아. 거의 완벽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 행복이 깨질까봐 두려워.

 

나는 전혀 공감이 안됐다. 중학교2학년 시절, 지금이 너무 좋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고 또 그런 생각은 해본적도 없었다.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그 때 내 가장 큰 고민은 양아치들과 같은반인게 괴롭다는 것이었다. 그 양아치 애들은 툭하면 아이들을 괴롭혔는데. 물론 나를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게 늘 불안했다. 혹시 이들과 틀어져 홀로 남게 되면 저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게 무서웠다.

 

어흥.

그 양아치 애들은 반에서 제일 친구가 없고 힘없고 말도 잘 못하는 애들을 괴롭혔다. 여자중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로 차고 때리고 책상위를 어지럽히고 가방을 훼손했다.

 

그 양아치 무리 가운데 한명이 밉보였던 것 같다. 그 한 명은 같은 무리였다가 갑자기 왕따신세로 전락하더니 집단으로 폭행을 당한 모양이었다. 학교에 팔에 깁스를 한채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무리들 가운데 몇몇은 학교 봉사를 받았고 정학을 받기도 했고, 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도망치듯이 전학을 가버렸다. 그런 살벌한 정글이 내 학교 생활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지금은 그냥 저냥 괜찮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지만 갑자기 여기에서 떨어져 나가면 저들의 먹잇감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늘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서운 고양이 눈.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인데 3학년 언니들 가운데 몇몇은 되게 위협적으로 우리반에 와서 양아치무리들을 끌고 가기도 했다. 무서웠다. 학원을 다녔는데도 학원에서도 같은 반이나 학원안에 양아치 애들이 있어서 어딜가나 안심되지는 않았다. 늘 조심해야했다. 찍히지 말자. 최대한 조용히.

 

그들이 얼른 상고나 공고에 가버리고 나는 빨리 일반고에 가서 영영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하지도 않았고 무리에 소속돼있는 것이 그나마 내게 울타리였다.

 

행복한 고양이.

내 친한친구는 무엇이 행복했던 걸까. 뭐가 행복한데 ? 내 물음에 친구는 말했다.

 

너랑 다른 친구들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있고 엄마아빠랑도 좋아.

그냥 다 좋아. 다만 이게 깨질까봐 두려워.

 

그녀는 되게 어른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친구의 말이 지금 생각난 건 설날에 나홀로 지내면서 집을 정리하고 놀고 내 고양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다. 너무 좋은 생각이 들면 이것이 깨질까봐 살짝은 두려운 것이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었겠지 그 아이도.

 

귀여워
 

자그마치 6일이다. 내게는 6일의 자유시간이 있었다.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는 '휴가 강박증'을 안고서 호텔을 예약했다. 그래 호캉스를 해보자.

 

깔끔한 침실. 깔끔한 베게. 누리끼리하지도 않은 완벽한 흰색의 침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져있다. 머리카락 한올이 없는 깔끔한 침실에 누워있자니 상쾌하다.

 

내가 머문 호텔.

고양이는 생각도 안난다. 해야할 의무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내게는. 방마저 내게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집에서는 방에 누워 있자면 이곳 저곳에서 요란한 소리를 낸다.

 

머리카락을 치워줘. 베게 커버를 빨아줘. 침대보를 바꿔줘. 고양이털을 치워줘. 양말 속옷을 빨아줘..

 

할 일이 잔뜩 쌓인 방에서 벗어나 있자니 마음이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은 깃털이다. 고양이는 생각도 안난다. 잘 지낼거야. 내 고양이는. 내가 밥이랑 물 잘 주라고 신신당부 했으니.

 

고양이는 매우 잘 지냈다.

나는 나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 자신을 깊숙히. 나는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가 열심히 무언가를 메모한다. 나는 내 행동을 찬찬히 살핀다.

 

나는 무언가 생각이 나면 열심히 적는 인간이었어. 그런 뒤에는 그것을 바로 해치우지. 안그러면 숙제가 남은 것 같거든.

 

나는 며칠 동안을 나와 깊숙히 대화했다. 내가 어떤 마음이 드는지 어떤 사고의 회로로 결정을 내리는지.. 나와의 데이트가 지겨워졌을 때 쯤.. 집으로 돌아왔다.

 

 

내 불쌍한 아기 고양이는 나를 마중나와있다. 언제나처럼 내 앞에 얌전히. 나는 고양이를 꽉 껴안고 고양이의 털을 만진다. 정말 오랜만이다.

 

고양이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이런 느낌을 가지겠구나. 싶다. 이런 부드러운 털과 따뜻한 생명체.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저 모습. 고양이를 껴안고는 마구마구 쓰다듬는다.

 

내 손의 감각이 고양이를 잊어버린 것 같다. 고양이를 계속 기억하려고 나는 고양이를 계속 쓰다듬었다.

 

나를 만져줘..

 

 

 

고양이의 배변실례는 5일 만에 막을 내렸다. 나는 내 방을 화장실로 사용하는것이 항의의 표시인 것을 깨닫고 급격하게 화해 모드로 들어갔다.

 "미안하다. 아가야. 너를 앞으로 방안에 가두지 않을게."

 

사과를 하고 간식을 주고 쓰다듬고. 계속 계속 그랬다. 고양이가 화가 풀린 모양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날부터 화장실에 제대로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화장실 3개를 전부 다 이용한다. 참.. 신기하고 영리하다. 고양이가 바보인줄 알았는데. 고양이는 영리하다.

 

반려동물이 왜 '애완동물'이 아닌 줄 깨달았다. 동물도 생명이라서. 그들도 원하는 것이 있고 불만도 있고 삐지기도 하고. 화도 낸다. 정말 신기하다.

 

내 고양이는 의사표현을 명확하게 한다. 쓰다듬 당하고 싶으면 내게 오지만 충분하면 저리 간다. 그럼에도 계속 쓰다듬으면 살짝 문다.

 

고양이가 조금 싫어질 뻔 했다가 이해하고 나니 다시 좋아졌다. 나도 고양이의 사랑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고양이만 내 마음에 들어서 집에 온 것이 끝이 아니다.

 

그런 관계로 살아가야 해서 '반려동물'인가보다.

 

 

그리고 내 고양이가 방광염에 안걸린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친구는 이 스토리를 듣더니 내 고양이를 칭찬했다.

 

  "고양이야. 투쟁하길 잘했다. 덕분에 네 복지가 좋아졌구나. 앞으로 불쌍한 집사랑 사이좋게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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