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내 방에 오줌을 누는 행위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3일이 넘어갔다.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고양이가 처음으로 조금씩 싫어지기 시작했다.

 

동물병원에서는 "방광염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증상만 보면 아주 초기 증상이라고. 방광염 보조제를 먹이기로 했다. 고양이는 워낙 비뇨기과 질환에 자주 걸린다고 한다.

 

 

내 고양이는 내 방에 있는 창가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한다. 높은 데다가 바깥도 볼 수 있고. 내 모습도 보이니까.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항상 창가에 앉아있는데. 문제는 그 자리에서 바닥으로 오줌을 갈긴다. 바닥에 냄새가 벤 모양이다. 이제 내 방이 화장실이 될 위기에 처했다.

 

나는 세척제를 구입하고 방에 뿌리는 향기를 내는 액체도 구입했다. 화장실도 종류별로 사다 놓고. 모래도 종류별로 사다놨다.

 

화장실에 벤토모래를 깔아놓고 그 앞에는 배변매트를 쫙 깔았다. 이 가운데 딱 하나만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었다.

 

 

이 모든걸 하기 위해 나는 본격적으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청소를 하려고 하는데 이 녀석이 자꾸 돌아다니고 난리를 친다. 냉전중인만큼 나는 고양이를 혼냈다.

 

"가만있어!"

 

물론 귓등으로도 안듣는다.

 

점점 화가 나니 고양이를 들고 작은방에 넣었다. 이곳은 들어간적도 없고 오줌 냄새도 없는 데니까 얌전히 있겠지? 싶었다. 청소를 좀 하다가 3분 정도 지났을까. 너무 조용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방문을 보았다.

 

 

세상에. 오줌을 갈기고 있다. "너.. 오줌 싸는데 힘들었던 방광염 걸린 고양이 아니었니?"

 

 "너 방광염 걸린 것 같다고 내가 무려 20만 원이나 들여서 치료를 해준 것 같은데.."

 

오줌을 왜 이렇게 잘싸는거니. 생각을 해보니 이건 항의의 표시인 거다. 항의다.

 

반발이다! "나를 이 방에 가둬놓지 말아라 집사야!" 고양이의 오줌이 그런 의미였다는 걸 알았다.

 

 

생각을 해보니. 그렇다.. 처음 오줌을 내방에 갈긴 날도. 내가 밥먹는데 자꾸 와서 킁킁대니. 오지말라고 방안에 넣어둔 바로 그날인 것이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그날 항의했다.  무려 5일간이나.

 

고양이가 완벽하게 이겼다. 고양이의 5일 농성으로 얻은 것.

 

"여러개의 화장실"

 "좋은 벤토모래"

 "새로운 좋은 사료"

 

큼큼. 시큼. 큼큼. 냄새가 퍼져나간다. 내 방에서. 이것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정말 뭔지를 몰랐다. 내 방에 퍼져나가는 액체를 보면서도. 이것이 고양이의 오줌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옷에 묻은 모양인지 출근길에 냄새가 퍼져나간다. 아. 이게 대체 뭐지. 내가 어제 뭘 먹고 흘린 걸까. 그 다음날에 똑같은 액체가 내방에 있고 설상가상에 배변까지 있다.

 

이것은 고양이가 내방에 테러한 흔적이다. 내가 화장실을 잘 안치워줘서인가. 도대체 안그러던 애가 갑자기 왜 그러니. 화장실을 여태까지 몇번 바꿨는데도 얼마나 적응을 잘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방에 테러를 한다. 밥을 보니 밥도 적게 먹은 것 같다. 물도 조금 줄어든 것 같다. 병에 걸린걸까?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방광염은 아니라고 한다. 방광염이 오기 전 아주아주 초기에 데려온 것 같다고 한다. 요도 뚫는 시술을 하는데 마취도 하고 뚫으니 20만 원이 순식간에 나온다. 너무 비싸다.

 

그런데 비싼값도 못하는 것 같다. 계속 오줌을 갈긴다. 제대로 배변생활이 이뤄지지 않는다. 화장실은 전혀 쓰지를 않고 내 방에 냄새가 베인 그곳에만 오줌을 눈다. 정말 미칠 노릇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좋은 모래들을 구입해본다. 인터넷 강국에 사는 것이 너무 좋은 순간이다. 모래를 종류별로 사본다. 벤토, 두부 모래. 그리고 배변 매트. 화장실도 크기에 따라 다르니 몇개를 사고. 종이박스도 해놓는다.

 

"제발!! 저중에서 단한가지라도 마음에 들거라."

 

고양이의 궁둥이를 팡팡 때렸다. "제발! 제발! 제발!" 고양이는 난생 처음 겪어본 폭력인지 단 한번도 그런적이 없다가 나를 피해 숨었다.

 

 나를 피해다닌다. 이럴 수는 없다고. 어떻게 고양이가 나를 피할 수 있지. 하지만 이것은 고양이와의 배변전쟁을 시작하는 서막일 뿐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상상을 끝없이 한다. 그가 내 옆에 있다면 나는 이런 표정을 지으며 이런 얘기를 할텐데. 당신은 나를 항상 귀엽게 봐주니까 마음을 놓고 마음껏 애교를 부리는 상상. 같은 것을 하다보면 실제로 있지도 않은 사랑이 내 주위에 자리잡은 것 같아 마음이 좋다.

 

이것은 그래 상상연애다. 내게 필요한 사랑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만든 사랑에 내가 위로를 받고 필요한 사랑의 할당치를 채운다. 그렇게 그는 내 옆에 존재하고 있다.

 

 

그가 나와 나란히 카페에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상상에서. 그의 얼굴을 본다. 그도 나를 본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한다. 그냥 아무말도 없이 얼굴만 오래도록 쳐다본다. 긴 침묵.

 

나는 침묵을 깨고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려놓아 얼굴을 만져본다. 그는 가만히 있을 뿐이다. 아무말도 없이. 나는 그의 얼굴에 난 수염자국을 하나씩 만져보다가 물어보는 것이다. "넌 얼굴에 수염이 많아. 왜지?" 수염자국때문에 나와는 다른 남자다움이 느껴지는데 그건 속으로 삼키고서.

 

그는 "원래 그래. 얼굴에는 수염이 많아. 이것도 아침에 열심히 깎았는데 지금 벌써 이만큼."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더 많이 만져보는데.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나를 쳐다볼 뿐이다. 그는 그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마치 어떤 한마리의 청순한 어떤 사슴같이. 큰 눈망울로 촉촉하게 쳐다보고 내 쓰다듬에 몸을 맡기는 모습이 새삼 청순하게 느껴진다. 청순한 남자라.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다.

 

그의 얼굴을 계속 만지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목에 얼굴을 잠시 묻고 있었는데 그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이 순간이 어쩐지 너무 아름다워 1초가 마치 10초로 늘어난 듯이 이 순간이 어쩐지 오랫동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청순한 그 남자와 함께. 뭐 이런 생각을 혼자 앉아서 하다보니 내 마음에는 그리움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리움이 가득 들어차 그리움을 적어내려간다. 그리워. 당신.

 

 

그에게 이 마음을 적어 담아 아름답게 수놓은 어떤 글로, 아니면 어떤 음악으로, 아니면 내 목소리로 담고 싶다가도 나는 용기가 부족해 씁 한숨을 한번 쉬고는 애꿎은 고양이를 끌어 안는다.

 

고양이를 품에 안고는 고양이한테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고 말해. 고양이야. 사랑해. 얼굴을 부비고는 고양이를 쳐다본다. 큰 눈망울의 촉촉한 고양이는 내게 머리를 부비면서 내게 킁 킁 다가와 내게 입맞춘다. 고양이가 내게 다가와 뽀뽀해주다니. 기쁘다.

 

 

고양이. 내 사랑 고양이. 나는 알수 없는 그리움과 사랑과 애정을 마음에 품어. 내 마음이 그래도 더 너그럽고 더 사랑스럽고 더 관용적이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내게 곧 닥칠 마감이 임박한 일들과 알 수 없어 괴로운 세상의 소용돌이를 지금의 이 사랑으로 조금씩 이겨내보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혼자 상상해보는 주말이다.

아빠는 고양이를 보면서 "저리가버려. 훠이훠이"라고 말하면서 손짓을 했다.

 

고양이는 아무것도 모른채 사람이라면 다 좋아서 계속 서성댄다. 고양이의 몸짓은 분명 아무런 악의가 없는 그저 친근감일뿐 인데 아빠는 소스라치게 싫어한다.

 

아빠는 내게 "고양이를 이제정리하지그래. 누구를 준다거나. 밖에 내버리든가."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순 없지. 얘는 죽을때까지 내가 키우는 애야. 이제는. 그런거야. 지가 도망가거나 내가 잃어버리면 몰라도 내가 얘를 버릴리는 없어."라고 말했다.

 

내 품에 안겨있는 고양이.

 

나는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고양이를 쳐다보면서 "불쌍한 아기 고양이. 아빠가 뭐라고 하는지 못알아들어서 참 다행이다. 불쌍한 고양이."라고 혼자 중얼댔다.

 

아빠는 나의 이케아 가구를 열심히 조립해주면서도 고양이가 다가오면 훠이훠이 라면서 곁을 내주지 않았다.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모르는 고양이는 그것이 거절의 의미인지도 모른채 식빵자세를 하고서는 아빠를 쳐다보고만 있다.

 

마음에 불쌍함과 측은함이 피어올랐다. 아빠는 방전된 체력을 지니고서도 딸의 부탁을 거절할 만한 냉정함이 없어서, 그리고 그렇게 싫어하는 고양이 옆에서 열심히 가구를 조립했다. 아빠는 고양이를 싫어하고 고양이 냄새를 싫어하고 고양이 털을 싫어한다.

 

 

그러나 딸에 대한 사랑은 그 모든 싫어함에도 고양이와 한공간에 있기를 기꺼이 자처할 정도로 큰것이어서 "고양이를 내다버리라"고 한마디 말을 한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아빠는 그렇게 내 방에 와서 거의 이주일에 걸쳐서 이케아 가구를 다 조립했다. 그럴 때마다 "고양이를 저리 치우라"고 했으나 나는 고양이를 그저 꼭 끌어안았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아주 여러번 듣다보니 놀랍게도 내 사랑도 조금 사그라드는게 느껴졌다. 사실 고양이는 하등 쓸모가 없었다. 털이 심하게 날리고 배변에서는 냄새가 지독하고 .. 맞아. 훠이훠이.

 

싫어해. 너를 싫어해. 라는 말에도 얼마나 큰 힘이 있는건지 고작 몇번 들었음에도 사랑이 사그라드는 내 자신을 관찰하면서 부정적 말을 생각한다. 부정적 말은 그 자체로도 너무 큰 힘이 있어서. 정말로 사랑이 사그라들게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자존감이 낮고 스스로가 형편없으며 쓰레기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부정적 말의 위력안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리라. 나는 그래서 그러니까 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나의 아기고양이에게 짧은 말이라도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기로 다짐해버렸다.  

 

바보 고양이. 라고 말하는 대신 천사 고양이. 똑똑한 고양이. 그리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고양이라고. 말해준다.

 

그릉그릉. 아무것도 모르는 내 고양이는 내 품에 안겨서 머리를 부빌 뿐이다.

 

 

고양이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다.

 

나는 물론 고양이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고양이를 분양받을 때 어떤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그 분양샵에서 나에게 고양이의 소유가 이전된다는 그런 종류였다. 어쩐지 끔찍하게도 1달만에 고양이가 죽어버리면 새로운 고양이를 다시 준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고양이는 내꺼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고양이는 내 소유이지만 사실 존재자다. 내 옆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체라는 의미다.

 

고양이는 내 옆에서 움직이고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래서 소유보다는 존재다. 내 옆에 존재하는 내 반려동물이다. 고양이를 어따 쓰겠는가. 재산이나 소유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는 내 일상안에 들어와있는 아이다. 내 예쁜 아이.

 

 

혼자 사는 삶과 고양이가 있는 삶은 내용이 다르다. 나는 혼자 집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 놓고 음악을 크게 듣고 노트북을 해도 좋지만 그 풍경에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삶의 행복도가 곱하기가 된다. 왜일까.

 

고양이가 날 쳐다보기만 해도 행복도가 곱하기로 늘어난다니. 신기한 동물이다.

 

 

간밤에는 꿈을 꿨다. 혼자 사는 집인데 누군가 내 집에 얹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인간이 현관문을 제대로 닫고 다니지 않았다.

 

나는 주의를 줬다. "그렇게 문을 열고 다니다가는 고양이가 도망갈지도 몰라." 그런데 그 인간이 문을 계속 열어놓고 다니길래 나는 겁이 잔뜩 났다.

 

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고양이 잃어버리면 죽는 줄알아. 여기 각서에 싸인해. 고양이 잃어버리면 너 나한테 돈 얼마 줄 수 있어? 천만원은 있니?"

 

고양이를 잃어버렸나 싶어서 나는 집의 문을 다 닫고 난리를 치다가 잠에서 깼다. 나쁜 넘. 대체 그 인간이 누구였지.

 

 

 일어나보니 고양이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꿈에서까지 고양이와 함께 있으면서  아이를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한다.  아름다운 고양이.

 

고양이의 수명이 10~15년 사이라는 것이 슬프다. 한번씩 유명인의 반려동물이 죽었다는 얘기가 들려오면 그렇게 슬플수가 없다.

 

 고양이의 얼굴을 보다가도 이 녀석의 끝을 생각하게 된다. 끝나지마 묘생. 이라며 중얼대본다. 

 

묘생은 내 소유며 내 존재다. 이쁜 것. 언제까지나. 내 예쁜 묘생이겠지. 

 

그러니까 내가 원한건 그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거였다. 나는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고는 어깨에 나를 기대었다. 그는 따뜻하고 따뜻했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보고 그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좋아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그러니까, 어떤 성적 끌림을 느끼는 것은 아니어도, 그저 따뜻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와 얘기할 때는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사람을 속단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또 나는 어떤 믿음이 있었는데 그가 어떤 식으로든 나를 받아줄 것이라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긴장하거나 예의를 차리지 않았지만 내가 조금 무례하다 싶으면 그도 기분 나쁜 표시를 했다. 나는 그때마다 재빠르게 그에게 사과를 했다.

 

생각이 없는 고양이.

난 그에게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 어디에서도 안정감을 느끼지 못했으며 내게는 한 마리 고양이만 있을 따름이다. 고양이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 편안했다. 나는 고양이가 주는 안정감 말고 다른 종류의 편안함을 그에게서 느꼈다. 내 엄마도 내게 우리 관계가 완전히 끝장날 수 있을 것이란 암시를 주곤 했는데 고작 몇달 알게된 그에게서 편안함을 느끼다니.

 

내 엄마는 아주 가끔, 사실 꽤 자주, 자신의 죽음을 얘기했다. 그가 50살 무렵부터였나. 그는 곧 죽을 것이라고 했다. 자살을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럴 것이라는 그의 강한 예감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진지하게 유서를 쓰기도 하고 유언 비슷한 것을 남기면서 온갖 청승을 떨었다. 나는 그가 90년 정도는 살 것이란 강한 예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곧 죽지 못하면 난 하나님께 가서 죽게 해달라고 간절히, 마음을 다해서 기도할거야"라고 말했다.

 

그가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생명력은 질겨서 40년은 더 살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식으로 내게 미친 종류의 공포감을 준다는 것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내 엄마는 유언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너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라"는 식의 말을 정말 진심으로 내뱉었다. 그의 감정이 격해졌을 때 뿐 아니라 매우 차분할 때도 그 얘기를 했다. 한번 내뱉은 것이 아니라 여러번 얘기해서 그것이 진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만간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는 우울증인가. 어떤 우울증의 증세는 자신이 죽을 것이란 강한 예감을 느끼는 것도 포함된다고 했다.

 

그런 어떤 강한 확신에 가득 찬, 강성한 여자가 주는 생각을 끝없이 주입하면서 살았다. 나는 그 강성한 여자의 생각을 내것으로 받아들여 살아왔다.

 

그 결과 나는 모든 관계는 완전히 끝장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을 암시하는 아주 사소한 징후들을 찾아내었다. 연락이 안되거나, 표정이 싸늘하거나 하면 나는 그것을 "관계의 끝장남"의 징후로 받아들였다. 그 불안함 속에서 나는 살았다.

 

나는 내 영혼의 일부분을 모든 관계에 던져둔 것만 같다. 영혼의 일부를 타인에게 내줬다. 그리고는 내 영혼을 준만큼 예민하게 굴었다. 타인의 사랑을 면밀히 들여다보다가 허점을 발견하고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던 것이다. 이번의 사랑도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허점투성이군. 쳇. 하고 돌아서버렸다.

 

그는 나랑은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서는 '관계의 끝장남'이란 것도 없는 것 같고, 심각해지려는 찰나에는 그저 한번 으흐흐흐흐, 하고 웃어버리며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어쩐지 안정감이 넘치는 것 같아, 나는 불안해질 때면 그의 손목을 잡는다. 그리고는 그의 품에 파고들면서 말한다. "피곤해. 안아줘."

 

그 '피곤해, 안아줘'라는 말이 내 인생의 어떤 여정을 담은 것인지 그는 알까. 그 '피곤하다'는 의미는 내 육체의 일인가, 내 마음의 일인가. 나는 그에게 "추워. 왜이렇게 추울까" 했더니 그는 그 모든 것을 꿰뚫어버린 듯 "네 마음이 추워서야"라고 말한적이 있다.

 

그의 품안에 파고드는 나는 한마리의 고양이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의 손길에 만족해 그릉그릉거리는 고양이가 된 것 같다. 고양이의 그릉거리는 소리의 근원이 고양의 몸 어딘지 아직도 모르는 것처럼, 나도 그에게 안겨있으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는 강한 사랑에 휩싸이게 된다.

 

 

고양이한테 물어본 적도 없지만 나는 내가 맘에 들어서 고양이를 데려왔다.

 

고양이를 좋아해서이다. 순전히 내 의지다. 고양이는 나를 안좋아할수도 있는데.

 

그래서 가끔 고양이를 보다보면 혹시 나랑 같이 살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같이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고양이한테 물어보고 싶지만 말을 못하기 때문에 고양이의 행동을 보고 추측해본다. 고양이는 그래도 나를 썩 좋아하는 눈치인 것 같다.

 

고양이는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나를 마중나온다. 내가 힘없이 소파에 앉으면 내 무릎에 뛰어올라 오고 머리를 부빈다. 소파에 가지 않고 화장실로 가면 화장실까지 쫓아 들어와 화장실 바닥에 배를 눕히고 내 발에 머리를 부빈다.

 

화장실에서 이러지마. 싶지만 고양이는 반가움의 표시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양이는 내가 자려고 누워있으면 너무나 당연하게 내 배 위에 올라와서 식빵자세로 앉아 그릉댄다. 가끔 너무 당연하게 올라와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불만있는 표정.ㅋㅋ

 

고양이는 아마도 나랑 사는 것이 좋은 모양이긴 할테지만 그래도 불만사항은 있을 것 같다. 나는 회사를 자발적으로 매일 아침 가는데, 회사에 너무 오래있어서 외로울 것도 같고 나는 더러운 성격이라 집을 안치우니까 마음에 안들 것도 같고 . 뭐 불만이야 많겠지.

 

나는 회사에 내 의지로 매일 가지만 회사에 있는 것이 싫다. 고양이와는 다르게 내가 자발적으로 구직활동을 한 것이고 회사원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인데도 싫다.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지 회사에 오래 있기가 너무 싫다. 그리고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곳으로 옮기고 싶다.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 소속돼 있으면서 회사의 성공에 일조(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한다고 생각하며 회사가 잘되기를 바라야한다. 그래야 내가 먹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회사가 망하기 직전이라면? 나는 구직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나는 회사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지 않다. 가족이 망하면 그를 버리고 다른 가족을 찾아갈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냥 어쩔 수가 없다. 죽을 때까지 한배를 탄 몸이며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관계로 태어날 때부터 설정됐기 때문에 망하면 같이 망하고 잘되면 같이 잘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면 가족은 너무 끈끈하게 묶여있다. 일을 하고 있는 가장인 아빠가 망해버렸다고 해서 엄마가 그를 쉽게 버리지 못했듯이. 그리고 여전히 고통의 짐을 어깨 한쪽씩 나눠지고 있듯이. 그냥 그렇게 같이 어려운 형편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고양이는 나랑 태어날때부터 묶인 가족은 아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나의 가족인 셈이니까 마음에 안드는 것이 많아도 그냥 나랑 같이 살 것이다.

 

나도 가끔 고양이가 마음에 안들어도 그냥 같이 살것이다. 같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절대 버리지는 않고 방법을 고안하면서 살테지. 서로를 절대 버리지 않는 가족처럼.

 

그냥 갑자기 회사에 오래 있기가 싫어서 생각을 해봤다. 고양이가 집을 내가 회사를 생각하듯이 생각할까봐 갑자기 겁이나서.

"강아지나 고양이나 영혼이 없는 그냥 동물일 뿐이야. 난 동물 안 불쌍해."

 

내가 고등학생일 때 했던 말이다.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강아지 한마리가 불쌍하게 도로위에서 길을 건너고 있었다. 다들 불쌍하다고 입을 모았는데 나는 안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동물은 동물인데. 라는 생각이었다.

 

 

작년부터 고양이를 키우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물론 고양이한테 영혼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랑은 다르니까. 그냥 동물일 뿐이지만 불쌍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너무 좋다. 가끔은 정말 오바스럽게도 고양이 때문에 마음이 아플때도 있고 마음이 어떤 사랑으로 가득 차는 느낌도 받는다.

 

고양이한테 영혼은 없다고 해도 이런 얘기도 있다. 고양이가 죽고 나서 내가 죽으면 천국에서  고양이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거다. 심지어 cs루이스는 나니아연대기를 집필한 작가기도 하고 기독교인인데 키우던 강아지를 천국에서 볼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 성경을 다 뒤졌다. 동물과 천국에서 만날 수있는 가능성을 알고싶어서 말이다.

 

내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든 생각은 고양이랑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양이에게 말을 가르쳐보고 어떤 훈련같은 것을 해보았다. 소통을 하고 싶어서. 그런데 전혀 불가능했다. 고양이의 뇌는 나랑은 다르고 언어화한다거나 하는 능력이 없다. 동물이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한동안은 좀 슬펐다. 고양이가 너무 좋은데 고양이랑 얘기를 못한다는 것이.

 

고양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는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가 다 귀여웠다. 세수를 하는 것도, 그루밍을 하는 것도,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 하나하나가 귀여워서 다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막 사진을 찍을만큼 생소하게 귀엽지는 않다. 이제는 귀여운것보다 나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랑 딱 붙어있다거나, 나에게 달려와서 안겨있거나. 나를 지그시 보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한테 안긴 고양이.

 

고양이가 아플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고양이가 아픈적이 두어번 있었다. 한번은 무슨 음식을 잘못 먹고 토하고 설사를 했다. 그때는 정말 겁이 났다. 내가 느끼는 마음을 통해 아주 살짝 부모의 마음도 느꼈다.

 

한번은 고양이가 비뇨기과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양이를 위해서 100만 원도 선뜻 낼 수 있을까. 그 결심을 하는데 하루정도가 걸렸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하겠다는 결심이 서는데 말이다. 진짜 자식이면 달랐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실제로 그런 큰 돈은 들어가지 않았고 고양이는 건강해졌다.

 

나는 컴퓨터하는데 너는 턱을 괴고있네.

 

중요한 일을 해야할 때는 고양이를 떠나있는다. 고양이랑 놀다보면 자꾸 현재에 갇히게 되는 느낌이 든다. 지금 현재가 제일 좋아. 내일은 없어. 이런 느낌이 든다. 나는 급한 것을 빨리 해야하는데 말이다. 실제로 고양이가 시간을 의식하고 있는 방식과 나의 방식은 매우 다를 것이다. 나는 하루가 지날수록 더 나은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고양이에게는 그런 희망이나 바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양이가 동물인 것이 좋다고 느껴진다. 소통을 하지 못해 슬퍼했던 날은 뒤로 한다. 고양이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거의 없다. 화장실 치우기, 제때 밥이랑 물 놓기 정도다. 밥이 맛이 없다는 투정도 없고 혼자 맛있는 거 먹는다고 삐지지도 않는다. 그게 너무 좋다.

 

고양이는 정말 덩치가 빠르게 커진다. 얼마나 더 클까 궁금하다.

 

아깽이일때 조그맣다.

 

고양이 관련 동영상, 책, 글을 많이 보게 된다. 내 고양이만 이럴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다. 그냥 다른 고양이는 어떨지 궁금한 정도에 그치긴 한다. 행동을 취하거나 동물보호운동 같은 것보다는 다른 고양이들도 매우 귀여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궁금하다.

 

고양이는 정말 겁이 많고 호기심도 많다. 고양이는 자다가도 내가 비닐봉지를 뜯으면 아주 빠르게 달려온다. 그리고 아주 먼데서 큰 소리가 나면 겁이 나서 빠르게 숨어버린다. 고양이의 이런 엄청난 행동력을 볼때면 게으른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고양이는 항상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하루종일 내 품안에 안겨있는 시간은 20분 정도다. 20분이 지나면 쓰다듬을 다 당했으니 도도하게 사라진다. 항상 나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어느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있다.

 

잘때도 내 다리에 등을 기대는 정도로 스킨십을 한다. 다리를 내 몸에 대고 있는 정도다. 완전히 안겨있거나 푹 감싸지는 것은 별로 안좋아하는 것 같다.

 

고양이는 점프력이 굉장하다. 수직생활을 좋아한다.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고양이는 실제로 공간이 나뉘어있지 않아도 구분된 곳을 좋아한다. 실제로 나뉘어있지 않은 공간이지만 테이프로 사각형 테두리를 만들었거나, 수건이 펼쳐져 있거나, 시각적으로만 표시가 돼 있어도 그 안에 들어가있기를 좋아한다.

 

 

숨어있는 고양이는 부스럭거리는 장난감 소리에 뛰어나온다. 아니면 간식을 뜯어서 냄새로 유인하면 된다.

 

내가 음식을 먹고 있으면 달라는 의미로 애교를 부린다. 내 손이나 발에 자신의 머리를 계속 부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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