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TMI 2번째! 내 고양이의 사소한 버릇들을 소개한다.

 

내 고양이는 엄청나게 순한 편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머리를 부비며 친절하게 대한다. 낯선사람이 집에 왔다고 숨지 않는다. 강아지처럼 문 앞에 나와서 마중하고 환영해준다.

 

동물병원에 가서도 수의사들이 많이 하는 얘기가 정말 순하다, 는 것이다. 수의사가 고양이를 진료하기 위해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거나 등가죽을 잡거나, 어떻게 잡고 있어도 고양이는 가만히 있는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 야옹, 애처롭게 울기도 하지만.. 얌전하다.

 

 

내가 고양이를 계속 만지고 있어도 고양이는 가만히 있는다. 발바닥을 만지고 배를 만져도 가만히. 너무 순한 아기 고양이다. 가끔 신경질이 날때는 내 손을 깨물기도 하지만 아프지 않게 문다.

 

내 고양이는  대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대전에서 서울로 바로 이사왔기 때문에 태어나고 2개월 만에 서울고양이가 됐다. 내 4살조카는 동탄에 살고 있다. 이 4살아기는 내 고양이를 서울고양이라고 부른다. 나를 서울이모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실은 내 고양이는 사실 대전고양이라는 거. 물론 출신만 대전이고 주 거주지는 서울이다. 

 

 

내 고양이는 먼치킨 롱레그다. 먼치킨하면 삼시세끼에 나왔던 다리가 엄청 짧은 올망졸망한 고양이를 떠올리지만 내 고양이는 다리가 길다. 아무래도 잡종인 것 같지만 순종인것도 같고(먼치킨 롱레그라는 품종이 있나?) 잘 모르겠다. 먼치킨 품종이 고양이 중에서는 인간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내 고양이도 사람을 잘 따르는 것 같다.

 

내 고양이는 내 무릎에 올라올 때 특유의 순서가 있다. 먼저 책상 위에서 나를 내려다본다. 내가 다리를 꼬고 앉다가 다리를 풀면 내 다리를 다리삼아 건넌다. 다리를 다리삼아 사뿐사뿐 걸어서 내 쪽으로 오려고 한다. 몸을 쭉 펴고 두 다리를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내 왼쪽 어깨에 배를 착 대고 안긴다. 내 어깨에 매달린 자세로 있다가.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가르릉 댄다.

 

고양이가 왼쪽 어깨를 좋아하는 이유는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왼쪽 어깨에 턱을 대고 매달려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고양이의 엉덩이를 받치고 안아주면 어깨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편한 자세로 아기처럼 안겨있다. 

 

 

 

고양이를 때리거나 죽인다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내가 고양이를 키워서 그런지 그런 뉴스를 보게 되면 화가 난다. 고양이는 그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는 약한 동물이다.

 

고양이를 키워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가볍고 조그맣다. 안고 있을때는 작은 아기같고 누워서 자는 모습을 보면 천사같다. 고양이는 인간들이 구분 짓는 선과 악, 그 경계를 벗어나 있는 동물이다. 가치중립적으로 그냥 가만히 있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사는 연약한 동물일 뿐인데, 고양이보다 힘이 세다고 고양이한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느낄 수 있다. 고양이는 정말 작고 연약한 동물이라는 것을.

 

나는 고양이가 내게 오면 머리와 목, 등을 쓰다듬어 준다. 한 손안에 들어오는 머리와 목은 너무 연약해서 내가 손에 힘을 조금만 줘도 고양이는 쉽게 다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얌전히 쓰다듬어 준다. 고양이는 약한 동물이니, 약한 동물처럼 대해준다.

고양이가 가끔 발톱으로 할퀴거나 나를 물때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뭐 크게 다치는 거 아니니까 나는 그러려니한다. 대신 고양이의 발톱을 자주 잘라주고 고양이가 물 때는 이제 그만 만지라는 신호로 알고 손길을 거둘 뿐이다.

 

약한 자에게 약하게 대하고, 강한 자에게는 강하게 대하는 것은 인간 사이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해당되는 것 아닐까. 나보다 모든 점에서 연약한 동물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일은, 어떤 도덕이 필요하다.

 

오랜만에 대학교 동창을 만났다. 엄청나게 오랜만에 본 것인데 시간이 많이 흐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애들은 여전히 그애들 그대로 존재했고 시간만 흘렀을 뿐이었다.

 

우리는 몇년 만에 만나서 생각나는 것들을 얘기하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나의 고민에 친구는 "너는 능력이 있어서 다른 데 갈 수 있어도 워낙 잘하니까 더 있어도돼"라고 받아줬다. 그것은 내가 회사에서 받고 있는 대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회사 상사에게 받는 '마음에 들지 않음', 상사가 내게 쏟아내는 부정적 마음들, 모욕과 인격모독 같은 것들은 내 안에 깊은 분노가 자라게 했다. 나는 항상 '이 회사를 어떻게든 망하게 하리라'는 생각을 해왔다.

 

내 친구들은 회사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를 대우하는 것이 달랐다. 나는 강한 분노에 속해 있다가 친구들의 사랑안으로 넘어왔다. 우리들은 친구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서로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 진심이 담긴 눈과 말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나는 '이 순간은 아무도 내게서 빼앗지 못한다'는 생각을 깊게 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내가 느끼는 행복함은 오롯에 내것이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인간들은 회사에 몇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내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준다. 나는 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로우면서 노동을 파는 것보다 내 시간을 파는 것이 더 괴롭다고 느꼈다.

 

내가 고통스러운 시간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에 내 자유의지가 사라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부정적 감정에 있다는 것이 언제나 괴로웠다.

나는 '존재'냐 '소유'냐 딜레마에 한없이 빠져있다. 나는 늘 소유하기 위해 바쁘다고 생각했다. 어떤 소유들. 재산 뿐 아니라 학벌이라는 타이틀, 근사한 직업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근사한 물건 같은 실제적 소유를 한없이 추구했다. 내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있느냐, 내 이름으로 된 재산 같은 것들.

 

그러나 가끔은 소유보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순간에 느끼는 소중함과 기쁨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느냐와는 상관없이 내가 지금 느끼는 존재함인 것이다.

내가 나의 고양이에게서 느끼는 그것, 그것은 소유보다 존재였는데 이것은 고양이를 비롯해 내 친구들도 내게 선사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행복한 감정에 휩싸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존재들이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와서는 고양이와 함께 누워서 잠을 잤다. 친구들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리가 함께 보냈던 행복함을 다시 선사했고 고양이는 귀여운 존재 자체로 내 옆에 있어주면서 내게 행복함을 선사했다.

 

무언가를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보다는 가끔 그저 그냥 그렇게 행복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것도 나쁘지는 않다.

 

다섯살이 된 조카는 내 고양이를 너무 좋아한다. 하지만 자기 방식으로 좋아한다. 계속 만진다. 도망가도 쫓아가서 만진다. 구석으로 숨으면 그 구석으로 쫓아들어간다.

 

그리고 왜 자꾸 나를 피해? 라고 묻는다. 그럼 나는 조카의 머리와 얼굴을 막 만지고 배를 간지럽힌다. 누가 널 이렇게 계속 만져서 너가 싫어서 도망갔는데 쫓아다니면서 계속 만지면 넌 좋아? 고양이가 너 싫어할 것 같아.

 

조카는 입을 비쭉이며 나는 가만히 있을건데. 라고 한다. 아닌데. 너 저번에 이모한테 살려달라고 했는데. 난 약올리면서 웃는다. 깔깔깔.

똘똘한 아이는 고양이한테 미움을 받기는 싫은 모양이다. 이제 더 고양이를 만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양이를 안아준다. 그리고는 내가 안아주는데 왜 자꾸 움직여? 라고 묻는다.

 

그건 불편하니까. 너가 불편하게 안고있으니까. 너가 고양이 머리를 아래쪽으로 해서 자꾸 머리를 박으니까 고양이가 도망가지. 설명을 해준다.

 

아이는 깔깔 웃는다. 왜 그런건지 궁금한건 아닌 모양이다. 그냥 동물이 자신한테 안겨있다가 미끄러져 빠져 나가고 다시 잡으러 가고 다시 빠져 나가고. 이런 상황이 재밌는  모양이다. 그냥 계속 웃고 웃는다.

 

아니면 아직 작은 아이라 훨씬 작은 생명체를 만나보지 못해서 형아가 된 기분이 좋은가. 나도 뭔가 번쩍 번쩍 들 수 있다는데 기쁜걸까.

 

아이는 2018년 1월에 태어났고 고양이는 2018년 2월에 태어났다. 아이는 16키로이고 고양이는 4키로다. 나는 고양이를 4년째 키우고 있고 내 동생도 아이를 4년째 키우고 있다. 하지만 내 고양이는 이제 고작 10년정도 더 살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고양이를 자주 만나게 해 아이가 내 고양이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우리 10년 후에 고양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널 때 머리를 박고 같이울자. 이게 내 바람이자 큰그림이다.

 

그때까지 아이와 내가 고양이를 같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계속 함께 했으면 좋겠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있는 만큼 나중에 그만큼의 슬픔이 깊어질까봐 어쩐지 무섭다.

하지만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자라기만 아이의 시절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시절을 지나야만 비로소 성장을 할 수있고 인간이란 생명체가 돼 드디어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시기가 찾이오는 것처럼. 나의 훗날 어느 시기에도 내가 예상치 못한 슬픔이 있겠지만 또 기대치 못한 기쁨도 있을 것을 안다.

 

그저 자라고 무럭무럭 잘 크는것만 해도 되는 아이의 시절.

 

이 시절의 아이는 정말 타고난 그대로 지내고 있다. 그걸 보는게 난 즐겁다. 정말이지 인간이란 사실 원래 반짝반짝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 아이는 고양이의 자세를 한번 보고 너무 잘 따라한다. 한번 보고는 고양이 자세를 흉내낸다. 정말 타고난 재능이다. 이건 요가 자세, 스핑크스 자세인데. 배우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잘하는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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