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말썽을 피웠다. 얼마전 새로 노트북을 샀다. 동생이 다니는 회사의 임직원 몰에서 20만 원 정도 싸게 구입했다.

 

싸게 구입해서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내 노트북의 자판기 위에 마우스가 끼어져 있었고 뚜껑이 덮였다. 그냥 살짝 덮어져 있었다.

 

그 위로 고양이가 점프를 해서 올라갔다. 노트북 사이에 끼인 마우스와 고양이의 무게 덕분에 노트북 액정이 박살났다.

 

 

서비스센터에 가서 보니 수리비가 20만 원이 나왔다. 결국 제값에 노트북을 사게 된 셈이다.

 

아 나의 사랑하는 고양이. 고양이 덕분에 20만 원이 날라갔다. 그러나 뭐 화는 나지 않았다. 나는 무한대적 관용을 품고 있다. 고양이가 뭔 짓을 해도 나는 고양이를 용서한다.

 

 

고양이는 말썽을 조금씩 피운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까 청소기가 하루종일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거나.. 갑자기 세탁기가 혼자서 세탁을 하고 있다거나..

 

집에 있는 화분의 잎사귀나 꽃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고 화분이 박살나서 깨져있다.. 그릇들은 깨져서 유리조각으로 변해있다거나 등등..

 

 

그럼에도 내 마음속에는 분노같은 것은 없다. 그냥 '고양이야. 왜 그랬어. 귀찮다. 치우기 너무 귀찮아.'라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고양이를 사랑하고 있는데 가끔 내 사랑에 내가 놀란다. 고양이에게 한없는 애정과 관용을 보여주는 내 마음이 놀랍다. 어쩌면 이렇게 짜증도 안내고 화도 안내고 '그러려니' 할 수 있는 걸까.

 

 

내 자신에게도 나는 화를 자주 내고. 또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화를 내며..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한테도 짜증이 나는데.

 

내 마음에 둥둥 떠다니는 작은 사랑의 조각은 고양이에게로 모아진다. 나의 흩어져 있는 사랑의 조각은  고양이한테 모아져서 좀처럼 보이지 않던 배려와 관용이 생기게 된다.

 

어쩌면 내 사랑의 조각들은 내 마음의 귀찮음과 배려없음 짜증과 분노로 차있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집에 오면 비로소 얻게 되는 평화로 사랑의 조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나의 사랑에 내가 가끔 감동을 한다. 감동하면서 나 자신에 대한 미움도 없애보려고 노력한다. 고양이의 실수는 관용하면서 나 자신을 비롯한 타인의 실수에는 예민하지 말자고. 뭐 그런 다짐을 해보는 것이다.

 

 

내 고양이는 특이한 버릇이 있다. 왼쪽 앞발을 안으로 집어 넣는 것이다. 생후2개월부터 그랬다.

 

이 특이한 버릇은 내가 발견한 것이 아니다. 한 친구가 발견해줬다. 이 친구는 우리 집에 놀러와서 나랑은 안 놀고 고양이랑만 두어시간을 놀더니 이 버릇을 발견했다.

 

내 고양이의 특이한 포즈를. 고양이는 왼쪽 발을 안으로 집어넣는다.

 

왼쪽 발을 안에 집어넣는 고양이.

 

그 버릇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내가 억지로 고양이의 왼발을 밖으로 빼어 놔도 다시 집어넣는다. 건강상 문제는 없어보이니 냅두기로 한다. 이것도 내 고양이의 취향이겠지.

 

내 친구는 고양이랑 놀더니 집에 가기 매우 싫어했다. 친구는 이윽고 고양이를 사랑하게 됐다. 그 다음날 마트에 가서 간식거리를 잔뜩 사갖고 또 놀러왔다. 나랑은 안놀고 "이모가 또왔어. 고양이 안녕?" 말을 걸면서 고양이랑만 논다.

 

사진이랑 동영상도 잔뜩 찍어갔다.

 

왼쪽 발을 숨긴 고양이.

 

다른 친구도 우리집에 놀러와서는 고양이에게만 시선을 고정한다. 고양이 간식을 또 사와서 고양이의 환심을 얻으려고 한다. 나랑도 놀기는 했는데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처음 보면 너무 귀엽다. 발로 세수하는 것도 귀엽고. 사냥 본능이 나와서 장난감을 사냥하려는 것도 귀엽다.

 

 

나도 고양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 넋을 놓고 바라봤다. 너무너무 예뻐서. 왜 만화영화에 고양이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장난감도 엄청 많이 사고 사냥놀이도 엄청 자주 했다.

 

불을 꺼놓고 그림자 놀이도 하고. 그림자를 쫓아다니는게 너무 귀여웠다. 그런데 이제는 고양이가 노는 모습을 보는게 너무 익숙해져서 차라리 웃긴 포즈를 취하는게 더 웃기다. 웃긴 얼굴, 웃긴 행동 이런거 보는게 더 웃겨서 혼자서 깔깔 댄다.

 

아니 왜 이러고 있는거야?

 

고양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나도 좋고 친구들도 좋아하는 만큼 고양이 카페도 생기는 거고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사람들도 생기는 거겠지? 유튜브에서도 고양이 동영상이 인기가 많은 것일 테고.

 

나도 고양이의 귀여운 순간들을 사진속에 잔뜩 담아놨다. 고양이는 진짜 너무 귀엽다. 귀여워. 왜 그렇게 귀여울까 고양이는? 동물 중에서 제일 귀여운 것 같다. 그리고 내 고양이가 세계에서 제일 귀엽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양이야 얼음땡하는거야?
 

내 고양이는 지 멋대로다. 내 기분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는다.

 

내가 기분이 안좋아서 침대에 널부러져 누워 있으면 고양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배 위에 올라온다. 정말 배짱도 좋다.

 

그러나 고양이가 부드럽게 내 위에서 골골대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고양이가 더 있기를 바라지만 고양이는 지멋대로 나를 떠난다.

 

 

"고양이야. 내게 더 있어. 이리와. 이리와서 내 옆에 있으라구. 자꾸 어딜 도망가는거야? 이리오라니까."라고 간절히 불러봐도 들은척도 안한다. 정말 배짱도 좋다.

 

정말 자기 멋대로다. 고양이는 자신이 오고 싶을 때 내게 오고 충분히 만족했으면 내 기분 따위는 신경도 안쓰고 그저 떠나버린다.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고양이야. 네가 모르는 게 있는 모양인데. 네 밥이랑 물이랑 다 내가 주는거야. 너의 똥도 내가 치워주는 거란다. 고양이야. 밖에는 매우 추워. 집에 있으니까 따뜻한건지는 알고 있니? 너 내가 쫓아내면 어떻게 살려고 이렇게 배짱 좋게 굴어?" 라고 말을 걸었으나

 

고양이는 "그게 무슨 대수냐. 나는 네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거란 말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얼굴은 여전히 귀엽게 표정을 짓고서는

 

 

정말 어이가 없다. 이렇게 배짱 좋은 녀석을 다 봤나. 고양이의 배짱을 보면서 사실 내가 겹쳐 보였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쟤는 참 배짱도 좋아. 지 신경질을 있는대로 다 부리고. 밥 안먹겠다 뭐 안하겠다 투정 부리고. 참 배짱도 좋아. 지가 먹는거 입는거 자는데 다 우리가 준 건데."

 

"꼭 맡겨놓은 것처럼 당당하게 구는 저 배짱은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내 딸은 부모 마음 같은건 생각도 안하고 기분도 안살피고 지 하고 싶은대로 하는데 참. 저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내 배짱은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건 뭔가 태어날 때부터 알았던 본능이랄까. 내 부모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겠지 하는 마음.

 

그러나 철이들고 나이가 들면서 청소년기, 방황하던 시절의 내가 객관적으로 보인다. "너는 정말 배짱도 좋아. 마음에 안들고 짜증이 나면 그걸 다 표현하고. 네가 여태까지 살아온게 누구 덕인줄도 모르고. 정말."

 

내 고양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내 노트북도 망가뜨린 주제에. 지 마음대로 하고 있는 고양이를 보면서 나는 왠지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졌다.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를 엄마 아빠는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미워하고 싫어한다. 

 

엄마 아빠는 고양이를 자주 갖다가 버리라고 한다. 냄새도 나고 털도 날리고. 똥에서도 냄새가 난다고 한다. 나한테도 몸에서 고양이 냄새가 난다고 싫어한다. 내가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질색을 한다. 

 

고양이가 엄마아빠한테 다가가면 질색을 하면서 저리 치우라고 한다. "이리 못오게 해! 갖다 버리지 왜 계속 키우냐? 쓸데없는 것."

 

 

아빠는 종종 내게 "너한테 냄새가 나. 사람들이 너한테 말을 안하는거지. 너한테 몸에서 지독한 고양이 냄새가 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한국어를 할줄 몰라 다행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 옆에서 식빵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너무나도 얌전한 고양이다. 

 

고양이는 아무소리도 듣지 못해서 얌전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고양이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있다.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불쌍한 고양이. 말을 할 줄 몰라 어찌나 다행인지. 

 

 

내가 관심이 있는 것, 내 관심이 모인 곳, 내 사랑을 쏟는 곳에 타인이 무관심한다든가 아무런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화가 난다. 

 

내 사랑스러운 고양이인데 어찌 이렇게 사랑하지 않고 싫어할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일 뿐이다. 그 사람이 꼭 내 고양이를 사랑해야하는가? 아니 전혀. 그 사람 마음이지. 내 고양이는 내가 사랑하니까 그걸로 됐다. 

 

내가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쓰릴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 사람 탓인가? 아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인간은 지구상에 아빠가 유일하다. 내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한다. 누구도 내 아빠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빠는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을 극혐하지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캣타워를 조립해줬다. 아빠는 고양이는 매우 극혐하지만 나를 매우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니 캣타워를 조립해준다. 그것이 어떤 용도인지도 알지만 기꺼이 해준다. 

 

 

아빠는 나를 싫어하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면 슬플 거다. 그러나 나를 싫어하는 인간은 자기 마음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사랑은 오직 아빠의 것이다. 누구도 날 그만큼이나 사랑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경중이 있다. 경중. 무겁고 가벼운 것.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내 살길은 내가 헤쳐나가는 것이고, 내가 맡은 일은 내가 해내야 한다. 

 

돈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나를 위해서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상황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아주 오랫동안. 존재론적 질문까지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삼킬듯이 읽었다. 책의 문장, 그리고 작가의 생각들을 다 삼켜버릴 듯이 아주 오랫동안 탐독을 했다. 

 

작가들은 대개 생각이 깊고 아주 유연하다. 아주 유연하고 세심하다. 나는 그 문장에서 위로받았다. 나는 날마다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날마다 글을 썼다. 

 

나는 괴로웠다.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27세에 죽어버린 수많은 아티스트같이 인생을 끝장내버리고 싶었다. 아침이 뜨면 해가 떠서 괴로웠고 마음은 아주 슬픔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내 인생 전부였다. 그뿐이었다. 오로지 내 낙은 책 읽는 것, 그리고 먹는 것이었다. 

 

아주 깊은 우울에 잠겨서 아주 깊은 슬픔과 함께 . 그렇게 지냈던 인생은 언제 끝났던가. 어떻게 끝났었지. 그건 어떤 한 남자때문이었다. 

 

 

 

고양이가 내 방에 오줌을 누는 행위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3일이 넘어갔다.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고양이가 처음으로 조금씩 싫어지기 시작했다.

 

동물병원에서는 "방광염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증상만 보면 아주 초기 증상이라고. 방광염 보조제를 먹이기로 했다. 고양이는 워낙 비뇨기과 질환에 자주 걸린다고 한다.

 

 

내 고양이는 내 방에 있는 창가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한다. 높은 데다가 바깥도 볼 수 있고. 내 모습도 보이니까.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항상 창가에 앉아있는데. 문제는 그 자리에서 바닥으로 오줌을 갈긴다. 바닥에 냄새가 벤 모양이다. 이제 내 방이 화장실이 될 위기에 처했다.

 

나는 세척제를 구입하고 방에 뿌리는 향기를 내는 액체도 구입했다. 화장실도 종류별로 사다 놓고. 모래도 종류별로 사다놨다.

 

화장실에 벤토모래를 깔아놓고 그 앞에는 배변매트를 쫙 깔았다. 이 가운데 딱 하나만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었다.

 

 

이 모든걸 하기 위해 나는 본격적으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청소를 하려고 하는데 이 녀석이 자꾸 돌아다니고 난리를 친다. 냉전중인만큼 나는 고양이를 혼냈다.

 

"가만있어!"

 

물론 귓등으로도 안듣는다.

 

점점 화가 나니 고양이를 들고 작은방에 넣었다. 이곳은 들어간적도 없고 오줌 냄새도 없는 데니까 얌전히 있겠지? 싶었다. 청소를 좀 하다가 3분 정도 지났을까. 너무 조용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방문을 보았다.

 

 

세상에. 오줌을 갈기고 있다. "너.. 오줌 싸는데 힘들었던 방광염 걸린 고양이 아니었니?"

 

 "너 방광염 걸린 것 같다고 내가 무려 20만 원이나 들여서 치료를 해준 것 같은데.."

 

오줌을 왜 이렇게 잘싸는거니. 생각을 해보니 이건 항의의 표시인 거다. 항의다.

 

반발이다! "나를 이 방에 가둬놓지 말아라 집사야!" 고양이의 오줌이 그런 의미였다는 걸 알았다.

 

 

생각을 해보니. 그렇다.. 처음 오줌을 내방에 갈긴 날도. 내가 밥먹는데 자꾸 와서 킁킁대니. 오지말라고 방안에 넣어둔 바로 그날인 것이다. 그러니까 고양이가 그날 항의했다.  무려 5일간이나.

 

고양이가 완벽하게 이겼다. 고양이의 5일 농성으로 얻은 것.

 

"여러개의 화장실"

 "좋은 벤토모래"

 "새로운 좋은 사료"

 

큼큼. 시큼. 큼큼. 냄새가 퍼져나간다. 내 방에서. 이것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정말 뭔지를 몰랐다. 내 방에 퍼져나가는 액체를 보면서도. 이것이 고양이의 오줌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옷에 묻은 모양인지 출근길에 냄새가 퍼져나간다. 아. 이게 대체 뭐지. 내가 어제 뭘 먹고 흘린 걸까. 그 다음날에 똑같은 액체가 내방에 있고 설상가상에 배변까지 있다.

 

이것은 고양이가 내방에 테러한 흔적이다. 내가 화장실을 잘 안치워줘서인가. 도대체 안그러던 애가 갑자기 왜 그러니. 화장실을 여태까지 몇번 바꿨는데도 얼마나 적응을 잘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방에 테러를 한다. 밥을 보니 밥도 적게 먹은 것 같다. 물도 조금 줄어든 것 같다. 병에 걸린걸까?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방광염은 아니라고 한다. 방광염이 오기 전 아주아주 초기에 데려온 것 같다고 한다. 요도 뚫는 시술을 하는데 마취도 하고 뚫으니 20만 원이 순식간에 나온다. 너무 비싸다.

 

그런데 비싼값도 못하는 것 같다. 계속 오줌을 갈긴다. 제대로 배변생활이 이뤄지지 않는다. 화장실은 전혀 쓰지를 않고 내 방에 냄새가 베인 그곳에만 오줌을 눈다. 정말 미칠 노릇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좋은 모래들을 구입해본다. 인터넷 강국에 사는 것이 너무 좋은 순간이다. 모래를 종류별로 사본다. 벤토, 두부 모래. 그리고 배변 매트. 화장실도 크기에 따라 다르니 몇개를 사고. 종이박스도 해놓는다.

 

"제발!! 저중에서 단한가지라도 마음에 들거라."

 

고양이의 궁둥이를 팡팡 때렸다. "제발! 제발! 제발!" 고양이는 난생 처음 겪어본 폭력인지 단 한번도 그런적이 없다가 나를 피해 숨었다.

 

 나를 피해다닌다. 이럴 수는 없다고. 어떻게 고양이가 나를 피할 수 있지. 하지만 이것은 고양이와의 배변전쟁을 시작하는 서막일 뿐이었다.

 

 

고양이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다.

 

나는 물론 고양이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고양이를 분양받을 때 어떤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그 분양샵에서 나에게 고양이의 소유가 이전된다는 그런 종류였다. 어쩐지 끔찍하게도 1달만에 고양이가 죽어버리면 새로운 고양이를 다시 준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고양이는 내꺼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고양이는 내 소유이지만 사실 존재자다. 내 옆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체라는 의미다.

 

고양이는 내 옆에서 움직이고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래서 소유보다는 존재다. 내 옆에 존재하는 내 반려동물이다. 고양이를 어따 쓰겠는가. 재산이나 소유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는 내 일상안에 들어와있는 아이다. 내 예쁜 아이.

 

 

혼자 사는 삶과 고양이가 있는 삶은 내용이 다르다. 나는 혼자 집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 놓고 음악을 크게 듣고 노트북을 해도 좋지만 그 풍경에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삶의 행복도가 곱하기가 된다. 왜일까.

 

고양이가 날 쳐다보기만 해도 행복도가 곱하기로 늘어난다니. 신기한 동물이다.

 

 

간밤에는 꿈을 꿨다. 혼자 사는 집인데 누군가 내 집에 얹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인간이 현관문을 제대로 닫고 다니지 않았다.

 

나는 주의를 줬다. "그렇게 문을 열고 다니다가는 고양이가 도망갈지도 몰라." 그런데 그 인간이 문을 계속 열어놓고 다니길래 나는 겁이 잔뜩 났다.

 

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고양이 잃어버리면 죽는 줄알아. 여기 각서에 싸인해. 고양이 잃어버리면 너 나한테 돈 얼마 줄 수 있어? 천만원은 있니?"

 

고양이를 잃어버렸나 싶어서 나는 집의 문을 다 닫고 난리를 치다가 잠에서 깼다. 나쁜 넘. 대체 그 인간이 누구였지.

 

 

 일어나보니 고양이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꿈에서까지 고양이와 함께 있으면서  아이를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한다.  아름다운 고양이.

 

고양이의 수명이 10~15년 사이라는 것이 슬프다. 한번씩 유명인의 반려동물이 죽었다는 얘기가 들려오면 그렇게 슬플수가 없다.

 

 고양이의 얼굴을 보다가도 이 녀석의 끝을 생각하게 된다. 끝나지마 묘생. 이라며 중얼대본다. 

 

묘생은 내 소유며 내 존재다. 이쁜 것. 언제까지나. 내 예쁜 묘생이겠지.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고양이의 뇌가 작은것이 싫다. 고양이는 생각도 못하고 말도 못해서 나는 그 점이 안타깝다. 나는 고양이랑 얘기도 하고 싶고 고양이와 어떤 관계를 맺어나가고 싶은 데 고양인 동물이다.


그래서 인간이 탄생하게 됐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신이 인간을 흙으로 빚어놓고 보니 너무 예쁜거다. 그런데 생명체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데 불가능해서.

 

그래서 신이 지니고 있는 인격을, 신처럼 생각도 하고 감정도 느끼는 같은 종류의 인격을 인간에게도 부여한다. 그래서 지금 인간이 된건가, 싶었다.

고양이가 너무 예쁘지만 대화를 못하는게 늘 슬프다. 그리고 고양이가 본성으로 움직인다는 것도 슬프다. 모르겠다. 고양이는 왜 내게 와서 안기고 그릉거리는 걸까. 나는 고양이에게 무슨 존재일까.

나는 할일없이 그런 생각을 한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 수록 깊은 이 아이와 관계를 맺고 싶어진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 수록 동물이란 존재에 한계가 느껴져 슬프다.

고양이를 위해 여러가지 용품을 '또' 샀다. 사료는 이미 매우 많고 모래도 쌓여있으며, 차오츄르도 몇봉지나 있고 고양이 장난감도 매우 많은데, 나는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서. 쇼핑을 했다.

 

 더 좋은 화장실 한개와 더 좋은 모래 한봉지, 그리고 몇가지 장난감을 더 구매했다. 나는 왜 돈을 썼나. 정답은 고양이가 좋아서.

내 고양이는 인간같은 성정을 지니지는 않았고 뇌가 작아서 생각할 줄 아는 인격은 아니지만 동물 가운데서는 영리한 편인 것 같다. 마치 강아지 같기도 하다.

 

고양이가 매우 좋아하는 굵은 머리끈이 있다. 나는 그것을 저 멀리 던졌더니 고양이는 재빠르게 그것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그것을 물어왔다. 이럴수가. 고양이는 의기양양하고 늠름하다. 그리고는 강아지보다 더 의젓한 몸짓으로 우아하게 자신의 성과를 보여준다. 나는 성과물인  머리끈을 다시 던졌다. 다시 늠름하게 물어왔다. 다시 던졌다. 다시 물어온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슬펐다. 그리고 나는 어쩐지 인간의 창조됨을 생각하다가 신을 생각하다가 다시 우리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리고 신께 나와 고양이가 죽으면 천국에서 만날 수 있나요, 그 질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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