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사랑하는 눈길이 여럿 있다.

나도 항상 고양이를 바라볼 때 사랑스럽게 쳐다보지만 나라는 인간 1명을 빼고도 여러명이 더 있다.

 

내 친구들은 내 집에 놀러와서 고양이를 실제로 보고나면 예외없이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마치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이 아기 자랑을 위해 매일 아기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는 사람처럼 내 고양이를 자랑하게 되는데 이들은 그 자랑에 관대하다.

내 고양이는 절대적 귀여움과 절대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서 내 눈에만 이뻐보이는 것이 아니다.

내 고양이를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고양이를 예뻐한다. 내가 2년 전 쯤 고양이란 생물, 그 중에서도 내 고양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그 땐 나도 고양이와 오래 시간을 보내기 전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고양이의 치명적 귀여움에 취약할 때였다.

 

 


고양이는 그 자체로 아주 귀여운 생물인데 그 중에서도 내 고양이는 갓 태어났기 때문에 더 귀여웠다. 갓 태어나서 2주밖에 되지 않은 고양이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때는 고양이가 발로 얼굴을 부비는 것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등의 모든 행위에 깊은 사랑을 느꼈다. 내가 고양이의 매력에 취약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 때 나는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설렘이 강하게 느꼈다. 그 사랑은 몹시 강한 것이어서 나는 고양이를 데려오기 위한 60만 원을 선뜻 지불할 정도였다.

고양이는 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창조주의 창의력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며 속으로 중얼거리며 기도까지 올렸다. 고양이를 창조해줘서 감사하고 고양이를 내게 줘서 감사하다며.그 때 느꼈던 첫 만남의 사랑과 설렘은 지금은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고양이를 잔잔한 마음으로 사랑한다.

 



어떤 새로운 사람은 그 강한 사랑과 설렘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이는 내 고양이를 만난 뒤 내가 초기에 보여줬던 깊은 사랑과 설렘을 보여줬다. 고양이에게 아직 취약한 인간들이 그렇듯이 낯선 이도 고양이라는 생물 자체를 향한 감탄과 찬사와 함께 그 가운데서도 특히 ‘내 고양이’만이 갖는 어떤 특별함을 향해서 사랑을 보내왔다.

내 고양이를 사랑하는 친구는 여럿 있지만 3명 정도는 내 고양이를 매우 사랑하고 있다. 3명의 공통점은 집에 놀러와서 내 고양이와 오랜 시간 논 뒤, 그 다음날 사랑을 이기지 못해 다시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손에 간식을 사들고 다시 찾았다. 고양이가 그렇다. 매우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고양이 카페가 장사가 잘 되는 거겠지.

가장 큰 사랑을 보여준 친구가 있다. 그는 자신의 고오급 카메라와 편의점에서 파는 각종 고양이 간식들을 들서는 내 집을 재방문했다. 그리고서는 카메라로 고양이 사진 몇십장과 동영상을 잔뜩 찍어간 뒤 마치 자기 고양이를 자랑하듯이 인스타그램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고양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인스타그램에 업데이트를 했다.

 

 



내 고양이는 품종이 먼치킨(과 어떤 잡종이 섞인 잡종)인데다가 아직 어리고 팔팔해서 사람을 잘 따른다. 낯선 사람이 오면 여느 고양이처럼 숨지 않고 개처럼 킁킁대며 낯선이를 탐색하는 데 바쁘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롭고 낯선이에게도 마음을 열고 머리를 부빈다.

내 고양이의 이런 행동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자라나게 하는 것일까. 고양이를 향한 사랑의 눈길들이 늘어날수록 고양이는 더욱 사랑스러워진다. 사랑을 많이 받는 생명은 경계하거나 폭력적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만큼 더욱 사랑스러워지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제가 좋아하는 고양이를 소개합니다.

 

제 고양이는 주인을 생각해서 마스크를 갖다주기도 합니다. 보통 고양이가 주인이라고 하고 인간이 집사라고 하지만 제 고양이는 충성스러운 강아지에 가깝다고 할까요.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주워다주고 있을 뿐 아니라 한번도 하악질을 한 적도 없고 할퀸 적도 없어요. 떼를 쓴적도 없고 충성스럽게 기다리고 있는 착한 아이에요.     

그리고 애교도 많습니다. 항상 제가 집에 들어오면 집 앞에서 저를 마중나와 있어요. 저 뿐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 와도 누구든지 반갑게 맞이해줍니다.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한테 친근하게 구는 녀석입니다. 애교도 잘 부리는 애교쟁이에요. 제가 의자에 앉으면 제 무릎에 따라 앉고 머리를 부빕니다. 

제 품에 안겨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는 시간이 고양이에게는 필요합니다. 하루에 20분 정도는 제 온기를 나눠줘야 해요. 아직 3년밖에 안 된 작은 고양이라서 그런건지, 사람으로 치면 20대성인이기도 하지만 고양이는 아직도 아기입니다. 따뜻하게 포옹해줘야 하는 시간을 고양이는 너무 좋아합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20분이 지나면 스르르 사라집니다. 자신만의 공간으로 가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제 공간의 한 곳을 차지하는 아주 중요하고 사랑스러운 생명체입니다.     

 

고양이는 발라당 누워서 애교를 부리고 귀여워해달라고 합니다. 혼자 있는 것을 외로워하는 모양인 것 같습니다. 제가 집 밖으로 나갈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면 항상 저렇게 배를 까뒤집고 귀여운 척을 하면서 가지말라고 합니다. 이럴때는 마음이 살짝 아프기도 합니다. 동생을 데려와야 할까, 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하지만 제 고양이는 늘 조용합니다. 야옹, 하는 소리를 3년 동안 10번 정도밖에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너무 아프거나 너무 놀랐을 때만 야옹, 하고 소리를 냅니다. 침묵을 좋아하는 고양이에요.

고양이는 예쁘고 착하고 조용하고 사람을 잘 따릅니다. 고양이에게는 팬이 많습니다. 제 친구들중에는 고양이를 보러 제 집에 놀러오는 친구들도 몇 명 있습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제 집에서 만나는 장소를 정하는 것은 한가지 이유 때문이죠. 고양이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어린 팬은 제 4살 조카입니다. 제 조카는 고양이와 노는 시간을 항상 기다리고 있어서 식사를 건너뛰고 싶어합니다. 밥을 그만먹고 야옹이랑 놀고 싶어, 라고 말하면서 이모 밥을 이제 그만 먹어, 라고 조르기도 합니다. 고양이와 제 조카는 2018년 1월에 태어났는데, 어떻게 보면 사실 동갑입니다. 둘은 친구이기도 하지만 고양이의 삶이 훨씬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고양이의 나이가 훌쩍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양이가 제 조카랑 잘 놀아주는 셈이겠죠. 제 조카도 짓궂게 군적은 없고 야옹이를 관찰하고 쓰다듬어주고 쉴새 없이 물어봅니다. 야옹이는 왜 꼬리가 있어? 왜 수염이 있어? 왜 이렇게 앉아? 고양이는 항상 제 조카의 곁에 있어주고 머리를 부벼줍니다. 깨물지도 않고 할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줍니다. 이럴 때 보면 고양이는 마치 철이 든 성인 같기도 합니다. 

 

고양이는 가리는 것도 없고 예민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처음 고양이 분양샵에서 고양이를 봤을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2개월짜리 아기 고양이들이 많았기 대문에 저는 한 마리씩 제 품에 안아봤습니다. 제 품에 제일 조용히 가만히 안겨있는 아이가 바로 이 고양이었습니다. 낯선 제게도 몸을 내어주며 쌔근쌔근 잠드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고 그 순간 저는 사랑이 마음에 가득차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동물을 한번도 길러본 적이 없는 저는 일주일 정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다시 오라는 분양샵 아저씨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갔지만 애가 탔습니다. 내 고양이를 누가 데려갈까봐서 겁이 났거든요. 제 마음에 사랑을 가득 심어준 아이는 3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사랑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고양이와 함께 지내는 일상들이 참 좋습니다. 그저 3키로밖에 되지 않는 작은 생명체가 제게 주는 행복은 너무 큽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고양이가 사랑받고 있으니 저도 참 행복합니다. 고양이가 죽기 전까지 사람을 계속 무서워하지 않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에게서 어떤 폭력도 받지 않은, 폭력을 경험해보지 못한 순수한 동물로 그렇게 살다가 갔으면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내 사랑스러운 4살 조카는 내 고양이를 좋아한다. 이모네 야옹이를 보고싶다고 계속 말한다.

 

조카는 2018년 1월생이고 내 고양이도 2018년 1월생이다. 같은 나이다.

조카는 고양이를 만지고 궁금해한다. 수염이 왜 있어? 왜 이렇게 걸어다녀? 꼬리가 왜 있어? 이빨이 어딨어? 입을 벌리라고 해봐. 뛰어올라갔어.

 

조카는 야옹이가 귀엽다고 하고 옆에서 계속 쳐다본다. 나처럼 고양이를 놓고 머리를 쓰다듬고 안아주는게 아니라 친구처럼 얼굴을 본다. 굳이 식빵자세의 고양이의 얼굴 앞에 자기의 얼굴을 갖다대고는 얼굴을 동등하게 놓고는 눈을 맞춘다.

난 고양이가 너한테 머리늘 부비는건 너를 좋아해서 그러는거야. 라고 해줬다. 왜냐면 야옹이는 말을 못하니까. 머리를 대고 좋아한다고 해주는거야.

 

조카는 또 고개를 숙이고 야옹이의 얼굴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맞추고는 묻는다. 야옹아. 나 좋아해?

 

조카한테 야옹이 털색깔이 뭐같애? 노란색 주황색이지?했다. 조카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다리를 보여주더니 음. 나는 주황색이야? 라고 한다.

나의 사랑하는 조카와 나의 사랑하는 야옹이.

내가 무엇인가를 이토록 사랑한다는 마음을 주는 두 존재.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다. 언제나.

 

예쁘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아직 천사같은 3살배기 아가들. 어디서 왔니. 너희들은. 선물같은 존재들이다. 어디서 와서 이렇게 이쁜거니.

 

여행을 다녀왔다. 5일이었고 정말 간만에 떠난 여행이었다. 고양이는 아는 친구에게 맡겼다. 한 친구는 집에 방문해 먹을것을 챙겨준다고 했지만 혼자 며칠을 두는것보다 같이 있어줄 사람이 필요할거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고양이가 다른 집으로 다. 나는 여행 전날 내 집에서 혼자 있었다. 고양이없는 집이라니. 이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마중나오지 않았고 내가 집안을 돌아다녀도 아무도 나를 쫓아다니지 않았고 내가 의자에 앉았는데도 내 무릎 위는 휑했다. 잠에 들 때도 나 혼자였다.

 

난 습관처럼 “고양이야~, 야옹아~, 뭐하고 있어?” 라고 말을 걸었지만 집 안에는 어떤 생명의 흔적도 없었다. 잠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는데 그 어떤 기척도 들리지가 않아 고양이를 향한 그리움이 너무 커졌다. 4kg도 안되는 작은 고양이의 존재감이 이렇게 컸던가.

 

 

내가 여행지가 아닌 집에서 고양이없이 하루를 지냈기 때문에 외로움이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고양이가 없는 것은 당연했지만 집에서 고양이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고양이를 향해 말을 걸 때 “오늘은 뭐했어? 너 할 일 없지?”라고 다. 고양이가 매일매일 딱히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이번에 깨달았다. 고양이는 사실 그 존재 자체로 어떤 일을 하는 중이었다. 고양이가 돌아다니는 행위 자체, 돌아다니면서 내는 소리, 무심코 취하는 귀여운 제스처 등이 모두 큰 의미였고 고양이에게는 생명활동이었다.

 

나는 그날 고양이가 없는 하루를 보내며 익숙함과 늘 그 자리에 있는 줄 알았던 것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고양이, 그리고 나의 가족 말이다.

 

그저 언제나 여기에 있을 줄 알았던 고양이인데 없어지니 그리움이 커진 것처럼 언제나 평생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의 존재도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잔소리와 좋지 않았던 경험만 되씹고 있는 중이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내게 준 상처 같은 것, 기분이 안좋았던 것이나 또 뭔가 심기를 뒤틀리게 한 것 등을 곱씹어 대는 못된 생각을 하던중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런것들만 생각했지. 사실은 가족이 내 옆에 있다는 것, 내가 아플 때나 힘들 때 연락할 수 있다는 것, 갑자기 집밥이 먹고 싶어지면 그냥 찾아가도 된다는 것, 그런 것들이 사실 평생 당연하게 있을 것은 아니었다.

 

 

나는 부재 속에서 존재를 느꼈고 , 익숙함에서 소중함을 느꼈다.

 

평소에 당연하게 느끼던 고양이의 존재감, 예를 들어 내가 침대에 누우면 내 다리에 기대어 눕는 고양이의 온기가,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장롱 천장에 앉아서 날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이, 내 배위에서 가르랑거리는 고양이의 작은 소리가 되게 작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여행지에서도 일부러 고양이가 있는 카페를 찾아갔다.

 

그리고 내 고양이만큼 예쁜 고양이는 세상에 또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내 고양이는 유일하면서도 독특한,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독자가 됐다.

 

C.S.루이스가 쓴 책에서 본 내용이 생각난다. 하나님이 한 명의 인간을 유일하게 여기고 그 한 명을 구원한 것처럼 아마도 고양이나 개 등 반려동물도 인간에게 하나의 유일한 생명체가 되면 그들에게도 영혼이 생겨 우리가 천국에서 만날 수도 있단 내용이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성경을 뒤져 동물의 영혼의 근거를 찾은 것은 그가 키우던 개 때문이었다. 나도 그의 열심을 보면서 이것이 개를 향한 사랑 때문임을 알아 그 마음이 소중하게 느껴졌고 정말로 고양이와 천국에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안심을 얻게 됐다.

 

고양이의 삶을 보면서, 왜 애완동물이란 말이 반려동물로 바뀐건지 얼핏 알것 같았다.

 

고양이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밖에 나갔다 와도 뭘 하고 와도 고양이는 침대에 누운 자세 그대로 있다. 고양이는 누워있거나 잔다. 가끔 밥과 물을 먹는다. 그리고 내가 놀아주는 몇십분 동안을 뛰어다닌다.

 

고양이를 보면서 가끔 말을 건다. "넌 오늘 뭐할거니?" 고양이는 눈을 꿈벅이고 나는 다시 묻는다. "오늘은 뭐할거니? 할거 없어?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똑같이?" 라고 말을 걸면 고양이는 그렇다는 듯이 가만히 나를 쳐다본다.

 

어쩐지 고양이가 집안에 가만히 놓여져있는 의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가만히 앉아있고 조용히 움직이기 때문이다. 내 고양이는 특히 다른 고양이들보다 훨씬 조용하고 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다. 야옹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건 고양이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을 때다.

고양이는 정적이다.

뭐하고 있나 보면 항상 비슷하다. 창틀에 앉아서 밖을 본다.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동그랗게 잠을 잔다.

침대 위에 이불에 비스듬히 기대서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잔다.

장롱 천장에 뛰어올라가서 아주 깊숙한 곳에서 잠을 잔다.

 

항상 어딘가에서 정적인 자세로 있기 때문에 집 안에 놓인 가구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용한 고양이도 밤에는 집안을 뛰어다닌다.

방에 있는 창틀에 올라갔다가 거실을 한바퀴 돌고 작은 방 창틀에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새벽에 우다다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집 안을 몇바퀴 도는 것이 하루종일 고양이가 내는 소음의 전부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내게 와서 꾹꾹이를 한다. 내가 덮고 있는 이불 위에 올라와 입으로 이불을 물고 한발 한발 꾹꾹이를 한다. 왼발, 오른발 차례로 이불을 꾹꾹 누르면서 아기가 된 것처럼 군다. 고양이도 아기 고양이였을때 엄마가 생각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엔 너무 조용하고 정적인 고양이이지만 고양이에게도 삶이 있다. 고양이도 엄마 고양이로부터 태어났다. 인간처럼 사고하는 능력이나 자아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생명체니까 고양이도 고양이의 삶이 있는 셈이다.

 

고양이도 엄마 고양이로부터 탄생했고 자기만의 삶을 살아간다. 어떤 의미가 없어보이는 행동들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동물과 함께 사는 것을 인간 중심에서 바라보는 단어인 '애완동물'이 하나의 생명을 존중하자는 의미를 담은 단어인'반려동물'로 바뀌게 된 것 같다.

 

고양이랑 같이 지낸지 2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고양이가 싫었던 적은 두번 있었다. 처음은 자고 있는데 고양이가 내 머리칼을 갖고 장난을 치다가 할퀴어서 눈쪽에 상처가 났을 때다. 두 번째는 오줌을 아무데나 싸기 시작했는데 며칠동안이나 개선되지 않았을 때였다. 고양이가 노트북을 망가뜨려서 몇십만원을 수리비용으로 지불했을 때는 크게 화나지 않았다.

 

고양이가 싫었던 적은 그 때 두 번이었고 그래도 금방 화가 풀려서 고양이를 다시 좋아하게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양이가 더 좋아지고 있다. 이것이 참 신기한 일이다. 내 고양이는 엄청나게 애교가 많고 스킨십을 좋아한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나를 계속 쫓아다니다가 내가 의자에 앉으면 내 무릎에 뛰어올라와 나에게 머리를 부빈다.

 

나는 그 10분 남짓한 시간이 너무 좋다. 고양이는 꽤 외로운 모양인지 날마다 만져달라고 한다. 무릎에 올라와 내 어깨에 발을 대고 머리를 내게 부비는 그 시간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조용하다. 이 시간을 함께 할 때마다 내가 고양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

잠에 들기 전에도 고양이와 함께 잔다. 내가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으면 고양이는 잘 시간이라는 것을 아는지 내 머리맡에 다가와 웅크리고 같이 잠에 든다. 고양이가 깊은 잠에 빠질 때면 쌕쌕대는 숨소리가 커지고 어떤 잠꼬대같은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꼭 내게 보내는 신뢰와 사랑처럼 느껴진다.

 

내 생각에는 고양이가 지금 이 순간이 편안하고 좋기 때문에 내 곁에서 잠에 푹 든 것만 같아 잠꼬대까지 하는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를 향한 사랑이 커져간다.

 

고양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다가 고양이를 꽉 끌어안았던 적이 있다. 내 고양이는 나의 포옹을 언제나 반겨준다. 가만히 있는 고양이가 기특하게 느껴져 나는 혼잣말로 “우리 계속 이렇게 같이 살자. 너랑 나랑 둘이서. 우리 계속 이렇게 살자”라고 말했다.

 

고양이는 대답이라도 하는 듯이 머리를 내게 부비고 배를 뒤집어 보여준다. 난 그 모습이 너무 귀엽게 느껴져서 혼자서 크게 웃었다. “너도 좋아? 그래 알았어”라고 혼자 대답을 했다.

 

고양이를 때리거나 죽인다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내가 고양이를 키워서 그런지 그런 뉴스를 보게 되면 화가 난다. 고양이는 그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는 약한 동물이다.

 

고양이를 키워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가볍고 조그맣다. 안고 있을때는 작은 아기같고 누워서 자는 모습을 보면 천사같다. 고양이는 인간들이 구분 짓는 선과 악, 그 경계를 벗어나 있는 동물이다. 가치중립적으로 그냥 가만히 있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사는 연약한 동물일 뿐인데, 고양이보다 힘이 세다고 고양이한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느낄 수 있다. 고양이는 정말 작고 연약한 동물이라는 것을.

 

나는 고양이가 내게 오면 머리와 목, 등을 쓰다듬어 준다. 한 손안에 들어오는 머리와 목은 너무 연약해서 내가 손에 힘을 조금만 줘도 고양이는 쉽게 다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얌전히 쓰다듬어 준다. 고양이는 약한 동물이니, 약한 동물처럼 대해준다.

고양이가 가끔 발톱으로 할퀴거나 나를 물때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뭐 크게 다치는 거 아니니까 나는 그러려니한다. 대신 고양이의 발톱을 자주 잘라주고 고양이가 물 때는 이제 그만 만지라는 신호로 알고 손길을 거둘 뿐이다.

 

약한 자에게 약하게 대하고, 강한 자에게는 강하게 대하는 것은 인간 사이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해당되는 것 아닐까. 나보다 모든 점에서 연약한 동물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일은, 어떤 도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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