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를 엄마 아빠는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미워하고 싫어한다. 

 

엄마 아빠는 고양이를 자주 갖다가 버리라고 한다. 냄새도 나고 털도 날리고. 똥에서도 냄새가 난다고 한다. 나한테도 몸에서 고양이 냄새가 난다고 싫어한다. 내가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질색을 한다. 

 

고양이가 엄마아빠한테 다가가면 질색을 하면서 저리 치우라고 한다. "이리 못오게 해! 갖다 버리지 왜 계속 키우냐? 쓸데없는 것."

 

 

아빠는 종종 내게 "너한테 냄새가 나. 사람들이 너한테 말을 안하는거지. 너한테 몸에서 지독한 고양이 냄새가 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한국어를 할줄 몰라 다행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 옆에서 식빵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너무나도 얌전한 고양이다. 

 

고양이는 아무소리도 듣지 못해서 얌전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고양이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있다.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불쌍한 고양이. 말을 할 줄 몰라 어찌나 다행인지. 

 

 

내가 관심이 있는 것, 내 관심이 모인 곳, 내 사랑을 쏟는 곳에 타인이 무관심한다든가 아무런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화가 난다. 

 

내 사랑스러운 고양이인데 어찌 이렇게 사랑하지 않고 싫어할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일 뿐이다. 그 사람이 꼭 내 고양이를 사랑해야하는가? 아니 전혀. 그 사람 마음이지. 내 고양이는 내가 사랑하니까 그걸로 됐다. 

 

내가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쓰릴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 사람 탓인가? 아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인간은 지구상에 아빠가 유일하다. 내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한다. 누구도 내 아빠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빠는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을 극혐하지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캣타워를 조립해줬다. 아빠는 고양이는 매우 극혐하지만 나를 매우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니 캣타워를 조립해준다. 그것이 어떤 용도인지도 알지만 기꺼이 해준다. 

 

 

아빠는 나를 싫어하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면 슬플 거다. 그러나 나를 싫어하는 인간은 자기 마음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사랑은 오직 아빠의 것이다. 누구도 날 그만큼이나 사랑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경중이 있다. 경중. 무겁고 가벼운 것.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내 살길은 내가 헤쳐나가는 것이고, 내가 맡은 일은 내가 해내야 한다. 

 

돈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나를 위해서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상황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아주 오랫동안. 존재론적 질문까지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삼킬듯이 읽었다. 책의 문장, 그리고 작가의 생각들을 다 삼켜버릴 듯이 아주 오랫동안 탐독을 했다. 

 

작가들은 대개 생각이 깊고 아주 유연하다. 아주 유연하고 세심하다. 나는 그 문장에서 위로받았다. 나는 날마다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날마다 글을 썼다. 

 

나는 괴로웠다.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27세에 죽어버린 수많은 아티스트같이 인생을 끝장내버리고 싶었다. 아침이 뜨면 해가 떠서 괴로웠고 마음은 아주 슬픔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내 인생 전부였다. 그뿐이었다. 오로지 내 낙은 책 읽는 것, 그리고 먹는 것이었다. 

 

아주 깊은 우울에 잠겨서 아주 깊은 슬픔과 함께 . 그렇게 지냈던 인생은 언제 끝났던가. 어떻게 끝났었지. 그건 어떤 한 남자때문이었다. 

 

 

 

자그마치 6일이다. 내게는 6일의 자유시간이 있었다.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는 '휴가 강박증'을 안고서 호텔을 예약했다. 그래 호캉스를 해보자.

 

깔끔한 침실. 깔끔한 베게. 누리끼리하지도 않은 완벽한 흰색의 침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져있다. 머리카락 한올이 없는 깔끔한 침실에 누워있자니 상쾌하다.

 

내가 머문 호텔.

고양이는 생각도 안난다. 해야할 의무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내게는. 방마저 내게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집에서는 방에 누워 있자면 이곳 저곳에서 요란한 소리를 낸다.

 

머리카락을 치워줘. 베게 커버를 빨아줘. 침대보를 바꿔줘. 고양이털을 치워줘. 양말 속옷을 빨아줘..

 

할 일이 잔뜩 쌓인 방에서 벗어나 있자니 마음이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은 깃털이다. 고양이는 생각도 안난다. 잘 지낼거야. 내 고양이는. 내가 밥이랑 물 잘 주라고 신신당부 했으니.

 

고양이는 매우 잘 지냈다.

나는 나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 자신을 깊숙히. 나는 누워서 핸드폰을 보다가 열심히 무언가를 메모한다. 나는 내 행동을 찬찬히 살핀다.

 

나는 무언가 생각이 나면 열심히 적는 인간이었어. 그런 뒤에는 그것을 바로 해치우지. 안그러면 숙제가 남은 것 같거든.

 

나는 며칠 동안을 나와 깊숙히 대화했다. 내가 어떤 마음이 드는지 어떤 사고의 회로로 결정을 내리는지.. 나와의 데이트가 지겨워졌을 때 쯤.. 집으로 돌아왔다.

 

 

내 불쌍한 아기 고양이는 나를 마중나와있다. 언제나처럼 내 앞에 얌전히. 나는 고양이를 꽉 껴안고 고양이의 털을 만진다. 정말 오랜만이다.

 

고양이를 처음 만나는 사람은 이런 느낌을 가지겠구나. 싶다. 이런 부드러운 털과 따뜻한 생명체. 아름다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저 모습. 고양이를 껴안고는 마구마구 쓰다듬는다.

 

내 손의 감각이 고양이를 잊어버린 것 같다. 고양이를 계속 기억하려고 나는 고양이를 계속 쓰다듬었다.

 

나를 만져줘..

 

 

 

큼큼. 시큼. 큼큼. 냄새가 퍼져나간다. 내 방에서. 이것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정말 뭔지를 몰랐다. 내 방에 퍼져나가는 액체를 보면서도. 이것이 고양이의 오줌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옷에 묻은 모양인지 출근길에 냄새가 퍼져나간다. 아. 이게 대체 뭐지. 내가 어제 뭘 먹고 흘린 걸까. 그 다음날에 똑같은 액체가 내방에 있고 설상가상에 배변까지 있다.

 

이것은 고양이가 내방에 테러한 흔적이다. 내가 화장실을 잘 안치워줘서인가. 도대체 안그러던 애가 갑자기 왜 그러니. 화장실을 여태까지 몇번 바꿨는데도 얼마나 적응을 잘했는지 모른다.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방에 테러를 한다. 밥을 보니 밥도 적게 먹은 것 같다. 물도 조금 줄어든 것 같다. 병에 걸린걸까? 동물병원에 데려갔다.

 

방광염은 아니라고 한다. 방광염이 오기 전 아주아주 초기에 데려온 것 같다고 한다. 요도 뚫는 시술을 하는데 마취도 하고 뚫으니 20만 원이 순식간에 나온다. 너무 비싸다.

 

그런데 비싼값도 못하는 것 같다. 계속 오줌을 갈긴다. 제대로 배변생활이 이뤄지지 않는다. 화장실은 전혀 쓰지를 않고 내 방에 냄새가 베인 그곳에만 오줌을 눈다. 정말 미칠 노릇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좋은 모래들을 구입해본다. 인터넷 강국에 사는 것이 너무 좋은 순간이다. 모래를 종류별로 사본다. 벤토, 두부 모래. 그리고 배변 매트. 화장실도 크기에 따라 다르니 몇개를 사고. 종이박스도 해놓는다.

 

"제발!! 저중에서 단한가지라도 마음에 들거라."

 

고양이의 궁둥이를 팡팡 때렸다. "제발! 제발! 제발!" 고양이는 난생 처음 겪어본 폭력인지 단 한번도 그런적이 없다가 나를 피해 숨었다.

 

 나를 피해다닌다. 이럴 수는 없다고. 어떻게 고양이가 나를 피할 수 있지. 하지만 이것은 고양이와의 배변전쟁을 시작하는 서막일 뿐이었다.

 

 

고양이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다.

 

나는 물론 고양이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고양이를 분양받을 때 어떤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그 분양샵에서 나에게 고양이의 소유가 이전된다는 그런 종류였다. 어쩐지 끔찍하게도 1달만에 고양이가 죽어버리면 새로운 고양이를 다시 준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고양이는 내꺼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고양이는 내 소유이지만 사실 존재자다. 내 옆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체라는 의미다.

 

고양이는 내 옆에서 움직이고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래서 소유보다는 존재다. 내 옆에 존재하는 내 반려동물이다. 고양이를 어따 쓰겠는가. 재산이나 소유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는 내 일상안에 들어와있는 아이다. 내 예쁜 아이.

 

 

혼자 사는 삶과 고양이가 있는 삶은 내용이 다르다. 나는 혼자 집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 놓고 음악을 크게 듣고 노트북을 해도 좋지만 그 풍경에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삶의 행복도가 곱하기가 된다. 왜일까.

 

고양이가 날 쳐다보기만 해도 행복도가 곱하기로 늘어난다니. 신기한 동물이다.

 

 

간밤에는 꿈을 꿨다. 혼자 사는 집인데 누군가 내 집에 얹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인간이 현관문을 제대로 닫고 다니지 않았다.

 

나는 주의를 줬다. "그렇게 문을 열고 다니다가는 고양이가 도망갈지도 몰라." 그런데 그 인간이 문을 계속 열어놓고 다니길래 나는 겁이 잔뜩 났다.

 

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고양이 잃어버리면 죽는 줄알아. 여기 각서에 싸인해. 고양이 잃어버리면 너 나한테 돈 얼마 줄 수 있어? 천만원은 있니?"

 

고양이를 잃어버렸나 싶어서 나는 집의 문을 다 닫고 난리를 치다가 잠에서 깼다. 나쁜 넘. 대체 그 인간이 누구였지.

 

 

 일어나보니 고양이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꿈에서까지 고양이와 함께 있으면서  아이를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한다.  아름다운 고양이.

 

고양이의 수명이 10~15년 사이라는 것이 슬프다. 한번씩 유명인의 반려동물이 죽었다는 얘기가 들려오면 그렇게 슬플수가 없다.

 

 고양이의 얼굴을 보다가도 이 녀석의 끝을 생각하게 된다. 끝나지마 묘생. 이라며 중얼대본다. 

 

묘생은 내 소유며 내 존재다. 이쁜 것. 언제까지나. 내 예쁜 묘생이겠지. 

 

고양이한테 물어본 적도 없지만 나는 내가 맘에 들어서 고양이를 데려왔다.

 

고양이를 좋아해서이다. 순전히 내 의지다. 고양이는 나를 안좋아할수도 있는데.

 

그래서 가끔 고양이를 보다보면 혹시 나랑 같이 살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같이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고양이한테 물어보고 싶지만 말을 못하기 때문에 고양이의 행동을 보고 추측해본다. 고양이는 그래도 나를 썩 좋아하는 눈치인 것 같다.

 

고양이는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나를 마중나온다. 내가 힘없이 소파에 앉으면 내 무릎에 뛰어올라 오고 머리를 부빈다. 소파에 가지 않고 화장실로 가면 화장실까지 쫓아 들어와 화장실 바닥에 배를 눕히고 내 발에 머리를 부빈다.

 

화장실에서 이러지마. 싶지만 고양이는 반가움의 표시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양이는 내가 자려고 누워있으면 너무나 당연하게 내 배 위에 올라와서 식빵자세로 앉아 그릉댄다. 가끔 너무 당연하게 올라와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불만있는 표정.ㅋㅋ

 

고양이는 아마도 나랑 사는 것이 좋은 모양이긴 할테지만 그래도 불만사항은 있을 것 같다. 나는 회사를 자발적으로 매일 아침 가는데, 회사에 너무 오래있어서 외로울 것도 같고 나는 더러운 성격이라 집을 안치우니까 마음에 안들 것도 같고 . 뭐 불만이야 많겠지.

 

나는 회사에 내 의지로 매일 가지만 회사에 있는 것이 싫다. 고양이와는 다르게 내가 자발적으로 구직활동을 한 것이고 회사원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인데도 싫다.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지 회사에 오래 있기가 너무 싫다. 그리고 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곳으로 옮기고 싶다.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 소속돼 있으면서 회사의 성공에 일조(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한다고 생각하며 회사가 잘되기를 바라야한다. 그래야 내가 먹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회사가 망하기 직전이라면? 나는 구직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나는 회사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지 않다. 가족이 망하면 그를 버리고 다른 가족을 찾아갈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냥 어쩔 수가 없다. 죽을 때까지 한배를 탄 몸이며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관계로 태어날 때부터 설정됐기 때문에 망하면 같이 망하고 잘되면 같이 잘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면 가족은 너무 끈끈하게 묶여있다. 일을 하고 있는 가장인 아빠가 망해버렸다고 해서 엄마가 그를 쉽게 버리지 못했듯이. 그리고 여전히 고통의 짐을 어깨 한쪽씩 나눠지고 있듯이. 그냥 그렇게 같이 어려운 형편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고양이는 나랑 태어날때부터 묶인 가족은 아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나의 가족인 셈이니까 마음에 안드는 것이 많아도 그냥 나랑 같이 살 것이다.

 

나도 가끔 고양이가 마음에 안들어도 그냥 같이 살것이다. 같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절대 버리지는 않고 방법을 고안하면서 살테지. 서로를 절대 버리지 않는 가족처럼.

 

그냥 갑자기 회사에 오래 있기가 싫어서 생각을 해봤다. 고양이가 집을 내가 회사를 생각하듯이 생각할까봐 갑자기 겁이나서.

고양이는 아침 출근길마다 내 발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회사에 안가면 안돼?’라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배웅한다. 고양이는 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현관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고양이의 출근길 배웅을 맞이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고양이야, 집 잘 지키고 있어, 라고 말을 건넨 뒤 발을 떼고 문을 닫은 날이 1년이 넘어가면서 나는 항상 고양이에게 큰 안쓰러움을 느낀다.

 

 

고양이는 외롭다. 나는 혼자 살고, 고양이는 혼자 남겨진다. 내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고양이는 마치 강아지처럼 나를 현관에서 맞이하고 있다가 내 무릎에 뛰어올라 머리를 부빈다. 그릉대면서 쓰다듬어달라고 왼손에 머리를 부비다가 오른손에 머리를 부비다가 다시 왼손, 다시 오른손. 계속 머리를 부빈다.

 

이 시간은 내게는 너무 긴 것 같이 느껴지는 데다가 고양이가 정말로 내 아기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내게 몸을 누이고 배를 발랑 까서 보여주면서 그릉대는 고양이는 내 품에서만 평안을 찾는 것 같고 나는 고양이에게 무언가 굉장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아 나도 또한 이 시간에 깊은 만족감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한번 재보았다. 하루 10시간 정도 혼자 있는 고양이가 쓰다듬을 원하는 시간은, 사실 10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고양이는 10분 남짓 내게 안겨 있다가 다시 거리를 둔다. 더 만지려고 하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물기도 하면서 내게서 멀어진다. 역시 고양이는 고양이었다. 아무리 강아지 같지만.

 

그래도 고양이가 너무 외로워하는 것 같다. 고양이는 낮에는 계속 잠만 자고 내가 돌아오면 그제야 쌩쌩해져서 쓰다듬을 당하고 난 뒤 온 집안을 뛰어다닌다. 낮 시간에 동생 고양이와 함께 놀 수 있다면 밤에는 잠을 쿨쿨 자지 않을까.

 

 고양이도 같은 고양이 친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럼 밤에 시끄럽게 뛰어 다니지도 않을 것이고) 밤에 쌔근쌔근 잠에 들수도 있고 좋지 않을까.

 

그래서 내 고양이에게 동생 고양이를 주기로 했다. 고양이가 동생 고양이가 생기는 것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온전히 네가 외로울까봐 생각한 것인데, 혹시나 동생 고양이를 들이기로 한 것이 나만의 독단적 판단은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상대로 고양이가 동생 고양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매일 매일 동생이랑 노느라 이제 내가 회사에 가는 출근길에 현관문에서 마중도 안나오고 퇴근길에도 반갑게 강아지처럼 뛰어오지도 않으면, 이제 그 불쌍하고 큰 눈망울을 보지 않아서 안심도 되겠지만, 섭섭한 마음도 들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동생은 필요한 것 같고, 정말 모르겠다.

 

 

"강아지나 고양이나 영혼이 없는 그냥 동물일 뿐이야. 난 동물 안 불쌍해."

 

내가 고등학생일 때 했던 말이다.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강아지 한마리가 불쌍하게 도로위에서 길을 건너고 있었다. 다들 불쌍하다고 입을 모았는데 나는 안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동물은 동물인데. 라는 생각이었다.

 

 

작년부터 고양이를 키우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물론 고양이한테 영혼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랑은 다르니까. 그냥 동물일 뿐이지만 불쌍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너무 좋다. 가끔은 정말 오바스럽게도 고양이 때문에 마음이 아플때도 있고 마음이 어떤 사랑으로 가득 차는 느낌도 받는다.

 

고양이한테 영혼은 없다고 해도 이런 얘기도 있다. 고양이가 죽고 나서 내가 죽으면 천국에서  고양이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거다. 심지어 cs루이스는 나니아연대기를 집필한 작가기도 하고 기독교인인데 키우던 강아지를 천국에서 볼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 성경을 다 뒤졌다. 동물과 천국에서 만날 수있는 가능성을 알고싶어서 말이다.

 

내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든 생각은 고양이랑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양이에게 말을 가르쳐보고 어떤 훈련같은 것을 해보았다. 소통을 하고 싶어서. 그런데 전혀 불가능했다. 고양이의 뇌는 나랑은 다르고 언어화한다거나 하는 능력이 없다. 동물이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한동안은 좀 슬펐다. 고양이가 너무 좋은데 고양이랑 얘기를 못한다는 것이.

 

고양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는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가 다 귀여웠다. 세수를 하는 것도, 그루밍을 하는 것도,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 하나하나가 귀여워서 다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막 사진을 찍을만큼 생소하게 귀엽지는 않다. 이제는 귀여운것보다 나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랑 딱 붙어있다거나, 나에게 달려와서 안겨있거나. 나를 지그시 보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한테 안긴 고양이.

 

고양이가 아플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고양이가 아픈적이 두어번 있었다. 한번은 무슨 음식을 잘못 먹고 토하고 설사를 했다. 그때는 정말 겁이 났다. 내가 느끼는 마음을 통해 아주 살짝 부모의 마음도 느꼈다.

 

한번은 고양이가 비뇨기과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양이를 위해서 100만 원도 선뜻 낼 수 있을까. 그 결심을 하는데 하루정도가 걸렸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하겠다는 결심이 서는데 말이다. 진짜 자식이면 달랐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실제로 그런 큰 돈은 들어가지 않았고 고양이는 건강해졌다.

 

나는 컴퓨터하는데 너는 턱을 괴고있네.

 

중요한 일을 해야할 때는 고양이를 떠나있는다. 고양이랑 놀다보면 자꾸 현재에 갇히게 되는 느낌이 든다. 지금 현재가 제일 좋아. 내일은 없어. 이런 느낌이 든다. 나는 급한 것을 빨리 해야하는데 말이다. 실제로 고양이가 시간을 의식하고 있는 방식과 나의 방식은 매우 다를 것이다. 나는 하루가 지날수록 더 나은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고양이에게는 그런 희망이나 바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양이가 동물인 것이 좋다고 느껴진다. 소통을 하지 못해 슬퍼했던 날은 뒤로 한다. 고양이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거의 없다. 화장실 치우기, 제때 밥이랑 물 놓기 정도다. 밥이 맛이 없다는 투정도 없고 혼자 맛있는 거 먹는다고 삐지지도 않는다. 그게 너무 좋다.

 

고양이는 정말 덩치가 빠르게 커진다. 얼마나 더 클까 궁금하다.

 

아깽이일때 조그맣다.

 

고양이 관련 동영상, 책, 글을 많이 보게 된다. 내 고양이만 이럴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다. 그냥 다른 고양이는 어떨지 궁금한 정도에 그치긴 한다. 행동을 취하거나 동물보호운동 같은 것보다는 다른 고양이들도 매우 귀여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궁금하다.

 

고양이는 정말 겁이 많고 호기심도 많다. 고양이는 자다가도 내가 비닐봉지를 뜯으면 아주 빠르게 달려온다. 그리고 아주 먼데서 큰 소리가 나면 겁이 나서 빠르게 숨어버린다. 고양이의 이런 엄청난 행동력을 볼때면 게으른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고양이는 항상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하루종일 내 품안에 안겨있는 시간은 20분 정도다. 20분이 지나면 쓰다듬을 다 당했으니 도도하게 사라진다. 항상 나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어느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있다.

 

잘때도 내 다리에 등을 기대는 정도로 스킨십을 한다. 다리를 내 몸에 대고 있는 정도다. 완전히 안겨있거나 푹 감싸지는 것은 별로 안좋아하는 것 같다.

 

고양이는 점프력이 굉장하다. 수직생활을 좋아한다.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고양이는 실제로 공간이 나뉘어있지 않아도 구분된 곳을 좋아한다. 실제로 나뉘어있지 않은 공간이지만 테이프로 사각형 테두리를 만들었거나, 수건이 펼쳐져 있거나, 시각적으로만 표시가 돼 있어도 그 안에 들어가있기를 좋아한다.

 

 

숨어있는 고양이는 부스럭거리는 장난감 소리에 뛰어나온다. 아니면 간식을 뜯어서 냄새로 유인하면 된다.

 

내가 음식을 먹고 있으면 달라는 의미로 애교를 부린다. 내 손이나 발에 자신의 머리를 계속 부빈다.

 

 

 

고양이가 눈 앞에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종종 있다. 내 고양이는 주로 머무르고 있는 곳이 정해져있다. 캣타워 꼭대기, 그리고 의자, 침대 머리맡, 창가의 서랍장 위다.      

 

가끔 숨어있기도 하는데 장롱 안에 숨거나, 장롱 위를 뛰어올라가 천장에 숨는다. 정말 점프실력이 대단하다. 어떻게 천장까지 뛰어 올라가는 건지 모르겠다. 자신의 몸에 10배가 넘는 높이인데.      

 

나는 가끔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서랍장 위에서 고양이를 슬쩍 본 것만 같다. 그래서 고양이야, 이리와봐, 라고 말을 거는데 다시 살펴보면 서랍장 위에 고양이가 없다.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를 하다가도 고양이가 캣타워 위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착각할 때도 있다. 주로 캣타워 위에 고양이가 있기 때문인데 언제나 그렇듯이 고양이가 있을 줄 알았다가 캣타워를 다시 보면 고양이는 없다.      

 

화장실에서도 변기에 앉아있으면 고양이가 문밖에서 나를 쳐다보고만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정말 있을 때도 자주 있지만 없을 때도 있다. 그런데 나는 고양이를 본 것 같다. 이상한 일이다.      

 

 

아는 사람은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는데, 방에서 누워있었다가 강아지가 내는 발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강아지가 늘 내던 발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착각인지는 몰라도 강아지가 내게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런데 무서운 게 아니라 강아지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가만히 발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에게 강아지의 발소리가 들렸던 건 그렇게 믿고 싶어서였을까. 강아지가 아직 내 곁에 있다고.      

 

나도 고양이가 늘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믿고 싶은 걸까. 가끔은 정말로 이상하다. 고양이가 빠르게 돌아다녀서 그런건지.

 

하루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고양이가 안보였다. 고양이가 주로 머무는 장소를 집안에서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찾았다. 아무데서도 보이지가 않아서 정말 이상했다. 집 문을 열거나 창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디있는 걸까.  고양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흔들고 간식을 꺼냈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순식간에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크게 다가왔다.

 

밖에 나가서 근처에 있던 아저씨한테 “혹시 고양이 못보셨냐”고 묻기도 하고 집 밖에 나가서 고양이 간식을 놔뒀다. 혹시 나갔으면 돌아오라고.       

 

 

집에 들어오니 고양이가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공포심이 들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그래서 집안을 샅샅이 다 찾았지만 안보였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 고양이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단체가 있을까, 어디에 신고를 해야하나 등등의 생각을 다 했는데 고양이가 집에 있었다. 집에 숨겨진 비밀장소라도 있는 걸까.       

 

고양이는 정말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순식간에 없어진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고양이는 어느새 햇빛과 그림차처럼 늘 있는 생명체가 됐다. 그저 늘 있는 햇빛처럼, 늘 있는 그림차처럼, 그렇게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늘 있는 한폭의 풍경처럼.

     

항상 의식하지는 않지만 항상 눈에 띄는, 그런 햇빛과 그림자처럼 고양이는 내 공간에서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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