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좋지 않아서 집을 나섰다. 돈이 들어있는 체크카드를 들고, 발길 가는대로 걷고 있다.

 

체크카드에는 10만 원 남짓 들어있다. 발은 매우 무겁고 불편하다. 신발이 다 떨어져서 발이 불편하다. 신발을 사고 싶다는 욕구가 내 안에서 스물 피어오른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 그 순간 매우 큰 절망감을 느꼈다. 마음 깊숙이 밀려드는 절망감은 다른 이유도 아니고 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매우 슬프다.

 

어렸을 때는 그러한 절망감이 마음 곳곳에 퍼져서 존재론적인 물음까지 확장되었다. 소비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나의 능력, 아니 부모의 능력, 그 능력을 키우지 못한 부모의 게으름, 아니 사회의 억압, 사회의 부조리까지 생각은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른이니 그런 절망감의 싹은 고개를 들다가 다시 사라져 버린다.

 

길을 계속 걷는다. 카페가 보여서 커피 4천 원에 구입한다. 따뜻한 커피를 한입 마시면서 4천 원이 내게 2시간의 행복을 선사했음을 깨달았다. 돈으로 산 따뜻한 액체는 내게 두 시간 정도의 기쁨을 준다.

 

 

커피의 맛이 더 훌륭하고, 더 따뜻하면 나는 30분은 더 행복할 것이고, 생각보다 더 맛이 없다면 30분은 덜 행복하겠지. 나는 두 시간동안 커피를 마시면서 길을 걷는다.

 

따뜻하고 쌀쌀한 하늘을 보면서, 하늘은 언제나 하늘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늘은 변화하면서도 그대로다. 이것을 볼 수 있는 나의 눈에 감사한다. 이것을 느끼면서 언어화하는 나의 생각에도 감사한다.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몸을 베풀어준 부모에게도 감사한다.

 

 

부모님께 얼른 효도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돈을 많이 버는 일이다.

 

길을 걷다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제는 공부를 하러 갈 때다.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몇 권 산다. 책을 펼쳐들어 읽는다. 책이 주는 재미와 유익은 1만3500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세계로 나를 인도하며 나의 경험세계를 넓혀준다.

 

 

또한 책에 쓰여 있는 언어의 조합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아름다움마저 준다. 몇 시간의 독서를 마치고 일어나보니 하루가 전부 갔다.

 

오늘 내 하루의 시간은 17500원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느끼면서 하루만큼의 인간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소비가 아니다. 나는 움직였고, 다짐했으며, 또한 생산성을 얻는 데 에너지를 사용하였다.

 

 

하루의 삶이었다. 돈으로 운영된 시간과 그만큼의 성장의 시간이 공존했던 인생의 하루였던 셈이다.

이렇듯 돈은 사실 사회를 움직이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돈은 목적이 아니고, 운영되는 데 필요한 수단인 셈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실제로 누릴 수 있는 힘도 개개인의 능력이자, 개성이다.

 

돈으로 운영되는 개인의 삶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 그것을 언어화하여 전달하는 표현력, 표현하며 행복을 배가할 수 있는 인맥, 인맥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주까지 말이다.

 

개인의 삶에서 느끼는 감수성으로, 행복은 퍼져 나간다. 운영되는 것은 돈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돈을 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고양이가 한마리 있다. 그 고양이는 내게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안식처를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고양이를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오늘도 돈을 번다.

 

[편집자 주: 한겨레 문화센터 온라인 백일장에서 우수상을 탔던 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를 엄마 아빠는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미워하고 싫어한다. 

 

엄마 아빠는 고양이를 자주 갖다가 버리라고 한다. 냄새도 나고 털도 날리고. 똥에서도 냄새가 난다고 한다. 나한테도 몸에서 고양이 냄새가 난다고 싫어한다. 내가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질색을 한다. 

 

고양이가 엄마아빠한테 다가가면 질색을 하면서 저리 치우라고 한다. "이리 못오게 해! 갖다 버리지 왜 계속 키우냐? 쓸데없는 것."

 

 

아빠는 종종 내게 "너한테 냄새가 나. 사람들이 너한테 말을 안하는거지. 너한테 몸에서 지독한 고양이 냄새가 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한국어를 할줄 몰라 다행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 옆에서 식빵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너무나도 얌전한 고양이다. 

 

고양이는 아무소리도 듣지 못해서 얌전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고양이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있다.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불쌍한 고양이. 말을 할 줄 몰라 어찌나 다행인지. 

 

 

내가 관심이 있는 것, 내 관심이 모인 곳, 내 사랑을 쏟는 곳에 타인이 무관심한다든가 아무런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화가 난다. 

 

내 사랑스러운 고양이인데 어찌 이렇게 사랑하지 않고 싫어할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일 뿐이다. 그 사람이 꼭 내 고양이를 사랑해야하는가? 아니 전혀. 그 사람 마음이지. 내 고양이는 내가 사랑하니까 그걸로 됐다. 

 

내가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쓰릴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 사람 탓인가? 아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인간은 지구상에 아빠가 유일하다. 내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한다. 누구도 내 아빠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빠는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을 극혐하지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캣타워를 조립해줬다. 아빠는 고양이는 매우 극혐하지만 나를 매우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니 캣타워를 조립해준다. 그것이 어떤 용도인지도 알지만 기꺼이 해준다. 

 

 

아빠는 나를 싫어하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면 슬플 거다. 그러나 나를 싫어하는 인간은 자기 마음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사랑은 오직 아빠의 것이다. 누구도 날 그만큼이나 사랑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경중이 있다. 경중. 무겁고 가벼운 것.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내 살길은 내가 헤쳐나가는 것이고, 내가 맡은 일은 내가 해내야 한다. 

 

돈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나를 위해서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상황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아주 오랫동안. 존재론적 질문까지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삼킬듯이 읽었다. 책의 문장, 그리고 작가의 생각들을 다 삼켜버릴 듯이 아주 오랫동안 탐독을 했다. 

 

작가들은 대개 생각이 깊고 아주 유연하다. 아주 유연하고 세심하다. 나는 그 문장에서 위로받았다. 나는 날마다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날마다 글을 썼다. 

 

나는 괴로웠다.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27세에 죽어버린 수많은 아티스트같이 인생을 끝장내버리고 싶었다. 아침이 뜨면 해가 떠서 괴로웠고 마음은 아주 슬픔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내 인생 전부였다. 그뿐이었다. 오로지 내 낙은 책 읽는 것, 그리고 먹는 것이었다. 

 

아주 깊은 우울에 잠겨서 아주 깊은 슬픔과 함께 . 그렇게 지냈던 인생은 언제 끝났던가. 어떻게 끝났었지. 그건 어떤 한 남자때문이었다. 

 

 

 

중학교 2학년 어느날. 같이 다니던 친구가 말했다.

 

지금 나는 너무좋아. 거의 완벽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 행복이 깨질까봐 두려워.

 

나는 전혀 공감이 안됐다. 중학교2학년 시절, 지금이 너무 좋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고 또 그런 생각은 해본적도 없었다.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그 때 내 가장 큰 고민은 양아치들과 같은반인게 괴롭다는 것이었다. 그 양아치 애들은 툭하면 아이들을 괴롭혔는데. 물론 나를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게 늘 불안했다. 혹시 이들과 틀어져 홀로 남게 되면 저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게 무서웠다.

 

어흥.

그 양아치 애들은 반에서 제일 친구가 없고 힘없고 말도 잘 못하는 애들을 괴롭혔다. 여자중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로 차고 때리고 책상위를 어지럽히고 가방을 훼손했다.

 

그 양아치 무리 가운데 한명이 밉보였던 것 같다. 그 한 명은 같은 무리였다가 갑자기 왕따신세로 전락하더니 집단으로 폭행을 당한 모양이었다. 학교에 팔에 깁스를 한채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무리들 가운데 몇몇은 학교 봉사를 받았고 정학을 받기도 했고, 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도망치듯이 전학을 가버렸다. 그런 살벌한 정글이 내 학교 생활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지금은 그냥 저냥 괜찮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지만 갑자기 여기에서 떨어져 나가면 저들의 먹잇감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늘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서운 고양이 눈.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인데 3학년 언니들 가운데 몇몇은 되게 위협적으로 우리반에 와서 양아치무리들을 끌고 가기도 했다. 무서웠다. 학원을 다녔는데도 학원에서도 같은 반이나 학원안에 양아치 애들이 있어서 어딜가나 안심되지는 않았다. 늘 조심해야했다. 찍히지 말자. 최대한 조용히.

 

그들이 얼른 상고나 공고에 가버리고 나는 빨리 일반고에 가서 영영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하지도 않았고 무리에 소속돼있는 것이 그나마 내게 울타리였다.

 

행복한 고양이.

내 친한친구는 무엇이 행복했던 걸까. 뭐가 행복한데 ? 내 물음에 친구는 말했다.

 

너랑 다른 친구들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있고 엄마아빠랑도 좋아.

그냥 다 좋아. 다만 이게 깨질까봐 두려워.

 

그녀는 되게 어른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친구의 말이 지금 생각난 건 설날에 나홀로 지내면서 집을 정리하고 놀고 내 고양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다. 너무 좋은 생각이 들면 이것이 깨질까봐 살짝은 두려운 것이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었겠지 그 아이도.

 

귀여워
 

고양이의 배변실례는 5일 만에 막을 내렸다. 나는 내 방을 화장실로 사용하는것이 항의의 표시인 것을 깨닫고 급격하게 화해 모드로 들어갔다.

 "미안하다. 아가야. 너를 앞으로 방안에 가두지 않을게."

 

사과를 하고 간식을 주고 쓰다듬고. 계속 계속 그랬다. 고양이가 화가 풀린 모양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날부터 화장실에 제대로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화장실 3개를 전부 다 이용한다. 참.. 신기하고 영리하다. 고양이가 바보인줄 알았는데. 고양이는 영리하다.

 

반려동물이 왜 '애완동물'이 아닌 줄 깨달았다. 동물도 생명이라서. 그들도 원하는 것이 있고 불만도 있고 삐지기도 하고. 화도 낸다. 정말 신기하다.

 

내 고양이는 의사표현을 명확하게 한다. 쓰다듬 당하고 싶으면 내게 오지만 충분하면 저리 간다. 그럼에도 계속 쓰다듬으면 살짝 문다.

 

고양이가 조금 싫어질 뻔 했다가 이해하고 나니 다시 좋아졌다. 나도 고양이의 사랑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고양이만 내 마음에 들어서 집에 온 것이 끝이 아니다.

 

그런 관계로 살아가야 해서 '반려동물'인가보다.

 

 

그리고 내 고양이가 방광염에 안걸린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친구는 이 스토리를 듣더니 내 고양이를 칭찬했다.

 

  "고양이야. 투쟁하길 잘했다. 덕분에 네 복지가 좋아졌구나. 앞으로 불쌍한 집사랑 사이좋게 살아라."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상상을 끝없이 한다. 그가 내 옆에 있다면 나는 이런 표정을 지으며 이런 얘기를 할텐데. 당신은 나를 항상 귀엽게 봐주니까 마음을 놓고 마음껏 애교를 부리는 상상. 같은 것을 하다보면 실제로 있지도 않은 사랑이 내 주위에 자리잡은 것 같아 마음이 좋다.

 

이것은 그래 상상연애다. 내게 필요한 사랑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만든 사랑에 내가 위로를 받고 필요한 사랑의 할당치를 채운다. 그렇게 그는 내 옆에 존재하고 있다.

 

 

그가 나와 나란히 카페에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상상에서. 그의 얼굴을 본다. 그도 나를 본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한다. 그냥 아무말도 없이 얼굴만 오래도록 쳐다본다. 긴 침묵.

 

나는 침묵을 깨고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려놓아 얼굴을 만져본다. 그는 가만히 있을 뿐이다. 아무말도 없이. 나는 그의 얼굴에 난 수염자국을 하나씩 만져보다가 물어보는 것이다. "넌 얼굴에 수염이 많아. 왜지?" 수염자국때문에 나와는 다른 남자다움이 느껴지는데 그건 속으로 삼키고서.

 

그는 "원래 그래. 얼굴에는 수염이 많아. 이것도 아침에 열심히 깎았는데 지금 벌써 이만큼."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더 많이 만져보는데.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나를 쳐다볼 뿐이다. 그는 그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마치 어떤 한마리의 청순한 어떤 사슴같이. 큰 눈망울로 촉촉하게 쳐다보고 내 쓰다듬에 몸을 맡기는 모습이 새삼 청순하게 느껴진다. 청순한 남자라.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다.

 

그의 얼굴을 계속 만지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목에 얼굴을 잠시 묻고 있었는데 그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이 순간이 어쩐지 너무 아름다워 1초가 마치 10초로 늘어난 듯이 이 순간이 어쩐지 오랫동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청순한 그 남자와 함께. 뭐 이런 생각을 혼자 앉아서 하다보니 내 마음에는 그리움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리움이 가득 들어차 그리움을 적어내려간다. 그리워. 당신.

 

 

그에게 이 마음을 적어 담아 아름답게 수놓은 어떤 글로, 아니면 어떤 음악으로, 아니면 내 목소리로 담고 싶다가도 나는 용기가 부족해 씁 한숨을 한번 쉬고는 애꿎은 고양이를 끌어 안는다.

 

고양이를 품에 안고는 고양이한테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고 말해. 고양이야. 사랑해. 얼굴을 부비고는 고양이를 쳐다본다. 큰 눈망울의 촉촉한 고양이는 내게 머리를 부비면서 내게 킁 킁 다가와 내게 입맞춘다. 고양이가 내게 다가와 뽀뽀해주다니. 기쁘다.

 

 

고양이. 내 사랑 고양이. 나는 알수 없는 그리움과 사랑과 애정을 마음에 품어. 내 마음이 그래도 더 너그럽고 더 사랑스럽고 더 관용적이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내게 곧 닥칠 마감이 임박한 일들과 알 수 없어 괴로운 세상의 소용돌이를 지금의 이 사랑으로 조금씩 이겨내보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혼자 상상해보는 주말이다.

아빠는 고양이를 보면서 "저리가버려. 훠이훠이"라고 말하면서 손짓을 했다.

 

고양이는 아무것도 모른채 사람이라면 다 좋아서 계속 서성댄다. 고양이의 몸짓은 분명 아무런 악의가 없는 그저 친근감일뿐 인데 아빠는 소스라치게 싫어한다.

 

아빠는 내게 "고양이를 이제정리하지그래. 누구를 준다거나. 밖에 내버리든가."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순 없지. 얘는 죽을때까지 내가 키우는 애야. 이제는. 그런거야. 지가 도망가거나 내가 잃어버리면 몰라도 내가 얘를 버릴리는 없어."라고 말했다.

 

내 품에 안겨있는 고양이.

 

나는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고양이를 쳐다보면서 "불쌍한 아기 고양이. 아빠가 뭐라고 하는지 못알아들어서 참 다행이다. 불쌍한 고양이."라고 혼자 중얼댔다.

 

아빠는 나의 이케아 가구를 열심히 조립해주면서도 고양이가 다가오면 훠이훠이 라면서 곁을 내주지 않았다.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모르는 고양이는 그것이 거절의 의미인지도 모른채 식빵자세를 하고서는 아빠를 쳐다보고만 있다.

 

마음에 불쌍함과 측은함이 피어올랐다. 아빠는 방전된 체력을 지니고서도 딸의 부탁을 거절할 만한 냉정함이 없어서, 그리고 그렇게 싫어하는 고양이 옆에서 열심히 가구를 조립했다. 아빠는 고양이를 싫어하고 고양이 냄새를 싫어하고 고양이 털을 싫어한다.

 

 

그러나 딸에 대한 사랑은 그 모든 싫어함에도 고양이와 한공간에 있기를 기꺼이 자처할 정도로 큰것이어서 "고양이를 내다버리라"고 한마디 말을 한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아빠는 그렇게 내 방에 와서 거의 이주일에 걸쳐서 이케아 가구를 다 조립했다. 그럴 때마다 "고양이를 저리 치우라"고 했으나 나는 고양이를 그저 꼭 끌어안았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아주 여러번 듣다보니 놀랍게도 내 사랑도 조금 사그라드는게 느껴졌다. 사실 고양이는 하등 쓸모가 없었다. 털이 심하게 날리고 배변에서는 냄새가 지독하고 .. 맞아. 훠이훠이.

 

싫어해. 너를 싫어해. 라는 말에도 얼마나 큰 힘이 있는건지 고작 몇번 들었음에도 사랑이 사그라드는 내 자신을 관찰하면서 부정적 말을 생각한다. 부정적 말은 그 자체로도 너무 큰 힘이 있어서. 정말로 사랑이 사그라들게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자존감이 낮고 스스로가 형편없으며 쓰레기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부정적 말의 위력안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리라. 나는 그래서 그러니까 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나의 아기고양이에게 짧은 말이라도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기로 다짐해버렸다.  

 

바보 고양이. 라고 말하는 대신 천사 고양이. 똑똑한 고양이. 그리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고양이라고. 말해준다.

 

그릉그릉. 아무것도 모르는 내 고양이는 내 품에 안겨서 머리를 부빌 뿐이다.

 

 

고양이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다.

 

나는 물론 고양이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고양이를 분양받을 때 어떤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그 분양샵에서 나에게 고양이의 소유가 이전된다는 그런 종류였다. 어쩐지 끔찍하게도 1달만에 고양이가 죽어버리면 새로운 고양이를 다시 준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고양이는 내꺼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고양이는 내 소유이지만 사실 존재자다. 내 옆에 존재하고 있는 생명체라는 의미다.

 

고양이는 내 옆에서 움직이고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래서 소유보다는 존재다. 내 옆에 존재하는 내 반려동물이다. 고양이를 어따 쓰겠는가. 재산이나 소유가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는 내 일상안에 들어와있는 아이다. 내 예쁜 아이.

 

 

혼자 사는 삶과 고양이가 있는 삶은 내용이 다르다. 나는 혼자 집에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켜 놓고 음악을 크게 듣고 노트북을 해도 좋지만 그 풍경에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삶의 행복도가 곱하기가 된다. 왜일까.

 

고양이가 날 쳐다보기만 해도 행복도가 곱하기로 늘어난다니. 신기한 동물이다.

 

 

간밤에는 꿈을 꿨다. 혼자 사는 집인데 누군가 내 집에 얹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인간이 현관문을 제대로 닫고 다니지 않았다.

 

나는 주의를 줬다. "그렇게 문을 열고 다니다가는 고양이가 도망갈지도 몰라." 그런데 그 인간이 문을 계속 열어놓고 다니길래 나는 겁이 잔뜩 났다.

 

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고양이 잃어버리면 죽는 줄알아. 여기 각서에 싸인해. 고양이 잃어버리면 너 나한테 돈 얼마 줄 수 있어? 천만원은 있니?"

 

고양이를 잃어버렸나 싶어서 나는 집의 문을 다 닫고 난리를 치다가 잠에서 깼다. 나쁜 넘. 대체 그 인간이 누구였지.

 

 

 일어나보니 고양이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꿈에서까지 고양이와 함께 있으면서  아이를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한다.  아름다운 고양이.

 

고양이의 수명이 10~15년 사이라는 것이 슬프다. 한번씩 유명인의 반려동물이 죽었다는 얘기가 들려오면 그렇게 슬플수가 없다.

 

 고양이의 얼굴을 보다가도 이 녀석의 끝을 생각하게 된다. 끝나지마 묘생. 이라며 중얼대본다. 

 

묘생은 내 소유며 내 존재다. 이쁜 것. 언제까지나. 내 예쁜 묘생이겠지. 

 

그러니까 내가 원한건 그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거였다. 나는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고는 어깨에 나를 기대었다. 그는 따뜻하고 따뜻했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보고 그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좋아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그러니까, 어떤 성적 끌림을 느끼는 것은 아니어도, 그저 따뜻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와 얘기할 때는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사람을 속단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또 나는 어떤 믿음이 있었는데 그가 어떤 식으로든 나를 받아줄 것이라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긴장하거나 예의를 차리지 않았지만 내가 조금 무례하다 싶으면 그도 기분 나쁜 표시를 했다. 나는 그때마다 재빠르게 그에게 사과를 했다.

 

생각이 없는 고양이.

난 그에게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 어디에서도 안정감을 느끼지 못했으며 내게는 한 마리 고양이만 있을 따름이다. 고양이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 편안했다. 나는 고양이가 주는 안정감 말고 다른 종류의 편안함을 그에게서 느꼈다. 내 엄마도 내게 우리 관계가 완전히 끝장날 수 있을 것이란 암시를 주곤 했는데 고작 몇달 알게된 그에게서 편안함을 느끼다니.

 

내 엄마는 아주 가끔, 사실 꽤 자주, 자신의 죽음을 얘기했다. 그가 50살 무렵부터였나. 그는 곧 죽을 것이라고 했다. 자살을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럴 것이라는 그의 강한 예감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진지하게 유서를 쓰기도 하고 유언 비슷한 것을 남기면서 온갖 청승을 떨었다. 나는 그가 90년 정도는 살 것이란 강한 예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곧 죽지 못하면 난 하나님께 가서 죽게 해달라고 간절히, 마음을 다해서 기도할거야"라고 말했다.

 

그가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생명력은 질겨서 40년은 더 살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식으로 내게 미친 종류의 공포감을 준다는 것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내 엄마는 유언을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너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라"는 식의 말을 정말 진심으로 내뱉었다. 그의 감정이 격해졌을 때 뿐 아니라 매우 차분할 때도 그 얘기를 했다. 한번 내뱉은 것이 아니라 여러번 얘기해서 그것이 진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만간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는 우울증인가. 어떤 우울증의 증세는 자신이 죽을 것이란 강한 예감을 느끼는 것도 포함된다고 했다.

 

그런 어떤 강한 확신에 가득 찬, 강성한 여자가 주는 생각을 끝없이 주입하면서 살았다. 나는 그 강성한 여자의 생각을 내것으로 받아들여 살아왔다.

 

그 결과 나는 모든 관계는 완전히 끝장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을 암시하는 아주 사소한 징후들을 찾아내었다. 연락이 안되거나, 표정이 싸늘하거나 하면 나는 그것을 "관계의 끝장남"의 징후로 받아들였다. 그 불안함 속에서 나는 살았다.

 

나는 내 영혼의 일부분을 모든 관계에 던져둔 것만 같다. 영혼의 일부를 타인에게 내줬다. 그리고는 내 영혼을 준만큼 예민하게 굴었다. 타인의 사랑을 면밀히 들여다보다가 허점을 발견하고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던 것이다. 이번의 사랑도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허점투성이군. 쳇. 하고 돌아서버렸다.

 

그는 나랑은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서는 '관계의 끝장남'이란 것도 없는 것 같고, 심각해지려는 찰나에는 그저 한번 으흐흐흐흐, 하고 웃어버리며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에게는 어쩐지 안정감이 넘치는 것 같아, 나는 불안해질 때면 그의 손목을 잡는다. 그리고는 그의 품에 파고들면서 말한다. "피곤해. 안아줘."

 

그 '피곤해, 안아줘'라는 말이 내 인생의 어떤 여정을 담은 것인지 그는 알까. 그 '피곤하다'는 의미는 내 육체의 일인가, 내 마음의 일인가. 나는 그에게 "추워. 왜이렇게 추울까" 했더니 그는 그 모든 것을 꿰뚫어버린 듯 "네 마음이 추워서야"라고 말한적이 있다.

 

그의 품안에 파고드는 나는 한마리의 고양이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의 손길에 만족해 그릉그릉거리는 고양이가 된 것 같다. 고양이의 그릉거리는 소리의 근원이 고양의 몸 어딘지 아직도 모르는 것처럼, 나도 그에게 안겨있으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는 강한 사랑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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