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내 고양이를 데려왔다. 이제는 고양이 없는 삶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2018년 내가 제일 잘한 일이 고양이를 데려온 것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 고양이를 데려온 것. 내가 고양이를 발견한 것. 어쩜 나는 이렇게 완벽한 고양이를 발견했을까.

 

예쁘고 귀엽고 성격도 좋다. 예민하지도 않다. 사람을 좋아하고 야옹-야옹 울지도 않는다.

 삐지지도 않는다. 화도 안내고. 발톱을 잘라줘도 가만히 있는다.

 

 

문앞에서는 나를 매일 마중하러 나와있는다. 별명이 마중 고양이다.

 

잘때도 내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잔다.

 

그리고 화장실을 바꿔줘도 금방 적응한다. 사료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신다.

 

고양이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덕목을 전부 갖췄다.

 

 

요새는 귀여운 버릇도 생겼다. 내 옆에 있다가 나한테 고양이는 손을 내민다. 내 온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쑥 손을 내밀어 내 팔위에 올려놓는다. 교감하고 싶은걸까? 우리는 대화도 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왜 자꾸 손을 내미는걸까? 나의 온도를 느끼기 위한 고양이의 귀여운 몸짓이다.

 

내게 고양이는 손을 올려놓는다. "내가 옆에 있는걸 까먹지 마시게. 나는 살아있는 동물이야. 나는 체온이 따스한 생명체니까. 나를 부디 잘 돌봐줘."

 

귀여운 아가. 응 알았다. 나도 너의 말랑말랑한 젤리가 좋아.

 

 

기분이 좋지 않아서 집을 나섰다. 돈이 들어있는 체크카드를 들고, 발길 가는대로 걷고 있다.

 

체크카드에는 10만 원 남짓 들어있다. 발은 매우 무겁고 불편하다. 신발이 다 떨어져서 발이 불편하다. 신발을 사고 싶다는 욕구가 내 안에서 스물 피어오른다.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 그 순간 매우 큰 절망감을 느꼈다. 마음 깊숙이 밀려드는 절망감은 다른 이유도 아니고 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매우 슬프다.

 

어렸을 때는 그러한 절망감이 마음 곳곳에 퍼져서 존재론적인 물음까지 확장되었다. 소비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나의 능력, 아니 부모의 능력, 그 능력을 키우지 못한 부모의 게으름, 아니 사회의 억압, 사회의 부조리까지 생각은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른이니 그런 절망감의 싹은 고개를 들다가 다시 사라져 버린다.

 

길을 계속 걷는다. 카페가 보여서 커피 4천 원에 구입한다. 따뜻한 커피를 한입 마시면서 4천 원이 내게 2시간의 행복을 선사했음을 깨달았다. 돈으로 산 따뜻한 액체는 내게 두 시간 정도의 기쁨을 준다.

 

 

커피의 맛이 더 훌륭하고, 더 따뜻하면 나는 30분은 더 행복할 것이고, 생각보다 더 맛이 없다면 30분은 덜 행복하겠지. 나는 두 시간동안 커피를 마시면서 길을 걷는다.

 

따뜻하고 쌀쌀한 하늘을 보면서, 하늘은 언제나 하늘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늘은 변화하면서도 그대로다. 이것을 볼 수 있는 나의 눈에 감사한다. 이것을 느끼면서 언어화하는 나의 생각에도 감사한다.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몸을 베풀어준 부모에게도 감사한다.

 

 

부모님께 얼른 효도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돈을 많이 버는 일이다.

 

길을 걷다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제는 공부를 하러 갈 때다.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몇 권 산다. 책을 펼쳐들어 읽는다. 책이 주는 재미와 유익은 1만3500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세계로 나를 인도하며 나의 경험세계를 넓혀준다.

 

 

또한 책에 쓰여 있는 언어의 조합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아름다움마저 준다. 몇 시간의 독서를 마치고 일어나보니 하루가 전부 갔다.

 

오늘 내 하루의 시간은 17500원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느끼면서 하루만큼의 인간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소비가 아니다. 나는 움직였고, 다짐했으며, 또한 생산성을 얻는 데 에너지를 사용하였다.

 

 

하루의 삶이었다. 돈으로 운영된 시간과 그만큼의 성장의 시간이 공존했던 인생의 하루였던 셈이다.

이렇듯 돈은 사실 사회를 움직이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돈은 목적이 아니고, 운영되는 데 필요한 수단인 셈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실제로 누릴 수 있는 힘도 개개인의 능력이자, 개성이다.

 

돈으로 운영되는 개인의 삶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 그것을 언어화하여 전달하는 표현력, 표현하며 행복을 배가할 수 있는 인맥, 인맥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주까지 말이다.

 

개인의 삶에서 느끼는 감수성으로, 행복은 퍼져 나간다. 운영되는 것은 돈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돈을 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고양이가 한마리 있다. 그 고양이는 내게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안식처를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 고양이를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또 오늘도 돈을 번다.

 

[편집자 주: 한겨레 문화센터 온라인 백일장에서 우수상을 탔던 글입니다.]

내 고양이는 지 멋대로다. 내 기분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는다.

 

내가 기분이 안좋아서 침대에 널부러져 누워 있으면 고양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배 위에 올라온다. 정말 배짱도 좋다.

 

그러나 고양이가 부드럽게 내 위에서 골골대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고양이가 더 있기를 바라지만 고양이는 지멋대로 나를 떠난다.

 

 

"고양이야. 내게 더 있어. 이리와. 이리와서 내 옆에 있으라구. 자꾸 어딜 도망가는거야? 이리오라니까."라고 간절히 불러봐도 들은척도 안한다. 정말 배짱도 좋다.

 

정말 자기 멋대로다. 고양이는 자신이 오고 싶을 때 내게 오고 충분히 만족했으면 내 기분 따위는 신경도 안쓰고 그저 떠나버린다.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고양이야. 네가 모르는 게 있는 모양인데. 네 밥이랑 물이랑 다 내가 주는거야. 너의 똥도 내가 치워주는 거란다. 고양이야. 밖에는 매우 추워. 집에 있으니까 따뜻한건지는 알고 있니? 너 내가 쫓아내면 어떻게 살려고 이렇게 배짱 좋게 굴어?" 라고 말을 걸었으나

 

고양이는 "그게 무슨 대수냐. 나는 네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할거란 말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얼굴은 여전히 귀엽게 표정을 짓고서는

 

 

정말 어이가 없다. 이렇게 배짱 좋은 녀석을 다 봤나. 고양이의 배짱을 보면서 사실 내가 겹쳐 보였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쟤는 참 배짱도 좋아. 지 신경질을 있는대로 다 부리고. 밥 안먹겠다 뭐 안하겠다 투정 부리고. 참 배짱도 좋아. 지가 먹는거 입는거 자는데 다 우리가 준 건데."

 

"꼭 맡겨놓은 것처럼 당당하게 구는 저 배짱은 어디에서 나오는걸까. 내 딸은 부모 마음 같은건 생각도 안하고 기분도 안살피고 지 하고 싶은대로 하는데 참. 저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내 배짱은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건 뭔가 태어날 때부터 알았던 본능이랄까. 내 부모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겠지 하는 마음.

 

그러나 철이들고 나이가 들면서 청소년기, 방황하던 시절의 내가 객관적으로 보인다. "너는 정말 배짱도 좋아. 마음에 안들고 짜증이 나면 그걸 다 표현하고. 네가 여태까지 살아온게 누구 덕인줄도 모르고. 정말."

 

내 고양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내 노트북도 망가뜨린 주제에. 지 마음대로 하고 있는 고양이를 보면서 나는 왠지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졌다.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를 엄마 아빠는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미워하고 싫어한다. 

 

엄마 아빠는 고양이를 자주 갖다가 버리라고 한다. 냄새도 나고 털도 날리고. 똥에서도 냄새가 난다고 한다. 나한테도 몸에서 고양이 냄새가 난다고 싫어한다. 내가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질색을 한다. 

 

고양이가 엄마아빠한테 다가가면 질색을 하면서 저리 치우라고 한다. "이리 못오게 해! 갖다 버리지 왜 계속 키우냐? 쓸데없는 것."

 

 

아빠는 종종 내게 "너한테 냄새가 나. 사람들이 너한테 말을 안하는거지. 너한테 몸에서 지독한 고양이 냄새가 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한국어를 할줄 몰라 다행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 옆에서 식빵 자세로 웅크리고 있다. 너무나도 얌전한 고양이다. 

 

고양이는 아무소리도 듣지 못해서 얌전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 고양이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있다.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불쌍한 고양이. 말을 할 줄 몰라 어찌나 다행인지. 

 

 

내가 관심이 있는 것, 내 관심이 모인 곳, 내 사랑을 쏟는 곳에 타인이 무관심한다든가 아무런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화가 난다. 

 

내 사랑스러운 고양이인데 어찌 이렇게 사랑하지 않고 싫어할까.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일 뿐이다. 그 사람이 꼭 내 고양이를 사랑해야하는가? 아니 전혀. 그 사람 마음이지. 내 고양이는 내가 사랑하니까 그걸로 됐다. 

 

내가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쓰릴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 사람 탓인가? 아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인간은 지구상에 아빠가 유일하다. 내 아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한다. 누구도 내 아빠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빠는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을 극혐하지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캣타워를 조립해줬다. 아빠는 고양이는 매우 극혐하지만 나를 매우 사랑한다. 사랑하는 이의 부탁이니 캣타워를 조립해준다. 그것이 어떤 용도인지도 알지만 기꺼이 해준다. 

 

 

아빠는 나를 싫어하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면 슬플 거다. 그러나 나를 싫어하는 인간은 자기 마음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사랑은 오직 아빠의 것이다. 누구도 날 그만큼이나 사랑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경중이 있다. 경중. 무겁고 가벼운 것.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다. 내 살길은 내가 헤쳐나가는 것이고, 내가 맡은 일은 내가 해내야 한다. 

 

돈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나를 위해서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상황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아주 오랫동안. 존재론적 질문까지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삼킬듯이 읽었다. 책의 문장, 그리고 작가의 생각들을 다 삼켜버릴 듯이 아주 오랫동안 탐독을 했다. 

 

작가들은 대개 생각이 깊고 아주 유연하다. 아주 유연하고 세심하다. 나는 그 문장에서 위로받았다. 나는 날마다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날마다 글을 썼다. 

 

나는 괴로웠다.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27세에 죽어버린 수많은 아티스트같이 인생을 끝장내버리고 싶었다. 아침이 뜨면 해가 떠서 괴로웠고 마음은 아주 슬픔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내 인생 전부였다. 그뿐이었다. 오로지 내 낙은 책 읽는 것, 그리고 먹는 것이었다. 

 

아주 깊은 우울에 잠겨서 아주 깊은 슬픔과 함께 . 그렇게 지냈던 인생은 언제 끝났던가. 어떻게 끝났었지. 그건 어떤 한 남자때문이었다. 

 

 

 

중학교 2학년 어느날. 같이 다니던 친구가 말했다.

 

지금 나는 너무좋아. 거의 완벽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이 행복이 깨질까봐 두려워.

 

나는 전혀 공감이 안됐다. 중학교2학년 시절, 지금이 너무 좋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고 또 그런 생각은 해본적도 없었다.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그 때 내 가장 큰 고민은 양아치들과 같은반인게 괴롭다는 것이었다. 그 양아치 애들은 툭하면 아이들을 괴롭혔는데. 물론 나를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게 늘 불안했다. 혹시 이들과 틀어져 홀로 남게 되면 저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게 무서웠다.

 

어흥.

그 양아치 애들은 반에서 제일 친구가 없고 힘없고 말도 잘 못하는 애들을 괴롭혔다. 여자중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로 차고 때리고 책상위를 어지럽히고 가방을 훼손했다.

 

그 양아치 무리 가운데 한명이 밉보였던 것 같다. 그 한 명은 같은 무리였다가 갑자기 왕따신세로 전락하더니 집단으로 폭행을 당한 모양이었다. 학교에 팔에 깁스를 한채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무리들 가운데 몇몇은 학교 봉사를 받았고 정학을 받기도 했고, 폭행을 당한 피해자는 도망치듯이 전학을 가버렸다. 그런 살벌한 정글이 내 학교 생활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지금은 그냥 저냥 괜찮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지만 갑자기 여기에서 떨어져 나가면 저들의 먹잇감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늘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서운 고양이 눈.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인데 3학년 언니들 가운데 몇몇은 되게 위협적으로 우리반에 와서 양아치무리들을 끌고 가기도 했다. 무서웠다. 학원을 다녔는데도 학원에서도 같은 반이나 학원안에 양아치 애들이 있어서 어딜가나 안심되지는 않았다. 늘 조심해야했다. 찍히지 말자. 최대한 조용히.

 

그들이 얼른 상고나 공고에 가버리고 나는 빨리 일반고에 가서 영영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하지도 않았고 무리에 소속돼있는 것이 그나마 내게 울타리였다.

 

행복한 고양이.

내 친한친구는 무엇이 행복했던 걸까. 뭐가 행복한데 ? 내 물음에 친구는 말했다.

 

너랑 다른 친구들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있고 엄마아빠랑도 좋아.

그냥 다 좋아. 다만 이게 깨질까봐 두려워.

 

그녀는 되게 어른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친구의 말이 지금 생각난 건 설날에 나홀로 지내면서 집을 정리하고 놀고 내 고양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다. 너무 좋은 생각이 들면 이것이 깨질까봐 살짝은 두려운 것이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었겠지 그 아이도.

 

귀여워
 

내 귀여운 고양이는 그림자를 좋아한다. 흰 벽에 까만색 그림자가 일렁이면 그것을 쫓기에 바쁘다.

 

정말 실체인 내 손가락은 안보고 그림자만 쫓아다닌다. 흰 벽에 유난히 까만색 그림자라서 그럴까.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쫓아다니는 것이 바쁘다.

 

 

밤에 불을 꺼놓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내 배 위에서 고릉고릉 대면서 누워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양이가 바삐 움직인다.

 

바쁘게 무언가를 쫓아다닌다. 핸드폰 빛 때문에 흰 벽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쫓는 것이다. 내가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핸드폰을 갖고 노니 손가락 그림자를 쫓아다닌다.

 

 

고양이가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볼 때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고양이 눈에는 세계가 3차원이 아니라 2차원으로 보이는 걸까. 부피감이 있고 실체가 있어야 진짜라고 느끼는 인간과는 다르게 고양이는 모든것이 평면으로 보이는 걸까?

 

지치지도 않고 그림자를 쫓는다.

 

나는 밤에 잠들기 전에 불을 끈 채로 핸드폰 조명을 켜 고양이와 그림자 놀이를 하다가 잠에 든다. 고양이는 그렇게 하루의 끝을 함께 하고 있다.

 

내 삶의 시간들에 속속 들어와있는 고양이 덕분에 나는 또 쓸데없이 2차원과 3차원을 생각하다가 그 너머의 진실은 뭘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 8개월 된 내 아기 고양이는 자꾸 운다. 

 

원래 잘 울지 않는데 밤에 자꾸 애-옹 애-옹 거린다. 아무래도 이제 중성화 수술을 할 때가 온 것 같다. 

 

동물병원에 전화를 건다. "이제 8개월 된 아기 고양이구 남자앤데요. 중성화 수술 가능할까요?"문의를 하니 4시에 맞춰서 오라고 해서 고양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고양이는 태어난지 2개월만에 내 품으로 왔다. 분양소에서 두달을 지내다가 나한테 왔기 때문에 집 외에 고양이가 가본 장소는 없다. "고양이야. 강아지를 본 적이 있니?"

 

동물병원에는 강아지들이 많아서 엄청나게 짖는다. 내 고양이는 겁에 잔뜩 움츠렸다. 내 품에 파고든다.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고 숨어있다. 애기다. 정말 이렇게나 가엽다니. 

 

 

고양이가 불쌍하다. 중성화수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고양이 입장에서는 욕구가 사라지는 셈이다. 그렇지만 욕구를 살려두자니 나랑 함께 지내기는 더 어렵다. 

 

고양이가 중성화 수술을 하는 대신 나는 너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로 한다. "고양이야. 따뜻한 집과 안전함과 먹을 것을 죽을때까지 제공해줄게. 정말이야. 약속해." 고양이와 약속을 했다. 

 

불쌍한 고양이는 피검사를 마치고 마취제를 맞은 뒤 잠에 든다. 수술은 간단하게 끝났다. 집에 가서 청소를 해놓고 고양이의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뒀다. 아직 마취에 덜 깬 고양이를 데리러 다시 동물병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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