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는 때때로 현성을 생각했다. 아무런 서사도 아무런 정보도 없는 만남이었다. 그런데도 현성과의 짧은 만남이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보라와 현성은 서로 누구인지도 모른채 통화를 했다. 술에 취한 보라는 혀가 꼬부라져서는 엉엉 울다가 웃다가 애교를 부렸다. 그게 귀여워서인지 현성은 보라를 만나고 싶다고 졸라댔다. 현성은 추론에 추론을 더해 보라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둘은 만났다.

 

보라는 아무말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현성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보라는 현성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너는? " "하지만 나는 보라가 누구인지 모르는걸" "그렇지만 보라는 현성이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현성이는 아니야? 그런거야? 얼른 좋아한다고 말해. 얼른! " "그래 보라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런데 제일 좋다면서 왜 얼굴을 안보여주니." 따뜻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보라는 집이 어딘지 말을 안해줄 수가 없었다.

 

"현성이는 보라한테 뭐 해줄건데?"

"뭐를 해줄까. 뭐 해줬으면 좋겠어?"

"음 안아줄래?"

"그래 내가 안아줄게."

"안아만 줘야 돼 알았지?"

"그럴게."

 

보라는 안아만 준다는 현성의 말이 개수작이나 느끼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그저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일면식도 모르는 남자지만 보라를 안아만 줄 것 같았고 그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현성이를 만나게 됐다. 보라는 현성을 발견하자마자 현성이에게 가서 안겼다. 길을 잃고 헤매던 새끼 양이 엄마 품에 돌아와 안기듯이. 그렇게 와락.

 

키가 큰 현성의 어깨는 보라의 머리 위를 훌쩍 넘었다. 단단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고 보라의 어깨를 감싸 안는 현성의 팔이 따뜻했다. 현성은 보라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품에서 떼 보라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보라는 내가 현성의 마음에 들었을지, 두근대며 기다렸다. 현성은 다시 보라를 안았다. 그녀는 조바심이 났다. 그의 마음에 들었을까. 통과인가. 아닌가.

 

보라는 현성의 허리를 잡고 얼굴을 가슴에 묻고 한참을 서 있었다. 자신이 사는 집 근처 골목에서. 어두운 골목에서. 그녀는 이곳을 앞으로도 수 십번, 수 백번을 지나다닐 것이고 그때마다 가끔 현성과 자신을 생각하게 될 것이었다. 그 장면은 어떻게 기억될까. 한 때 외로움에 미쳐 행했던 어리석은 행동으로 기억될까. 성욕을 쫓아 온 어떤 남자의 실패담으로 기억될까. 아니면 그저 아름답게 포장한 사랑스러운 포옹으로 기억될까.

 

아무려면 어때. 보라는 이 순간이 지속하길 바랐다. 현성은 보라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우리 이틀 뒤 이곳에서 오후 3시에 보자”고 약속을 했다. 그렇게 둘은 십여분을 더 안고 있었다. 그리고 현성은 손을 흔들며 사라졌고 보라는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고 때때로 보라는 그곳을 지나며 현성을 생각한다.

 

 

보라는 그렇게 환과 헤어졌다. 환은 보라에게 막 대했다. 보라는 그게 막대한 건지 환의 성격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환을 사랑하자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분이 나빠져서 성질을 내니 환은 연락을 끊어버렸다. 보라는 마음이 아팠다. 이정도밖에 안되는 쉬운 인연인가 했다. 환을 사랑하고자 했는데 환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한편으로 보라는 속이 시원했다. 그와 좋았던 기억이 없어서인지 그를 금방 잊었다. 사실 보라는 그를 사랑했다기보다 그가 그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한 셈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재력과 그의 사회적 위치였다. 그는 그녀에게 나중에 살림을 하지 않아도 되며 운전 같은 건 하지말고 택시를 타고 다니라고 했다. 그는 부자였다. 또 서울대 출신이었고 현재 유망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니 앞으로 성공은 따라오게 돼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가져다줄 아름다운 미래가 사라져서 보라는 슬펐을 뿐이다.

 

보라는 그녀에게 그 정도로 찬란하게 아름다운 미래를 가져다 줄리가 없겠지만, 성실하고 똑똑하고 다정한 현우를 만나보기로 했다. 마음이 따뜻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그는 성실했다. 현우는 큰 야망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 점이 보라에게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다. 가끔 우울한 것도 같았다. 다른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삶이 펼쳐진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건 안정감일수도 있다. 현우의 일상과 반복적인 루틴이 보라에게는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현우의 그러한 점이 삶에 안정적 기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라는 늘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극도로 불안정한것을 파악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더 불안정해 보이는 현태였다.

 

보라와 현태는 소설 얘기를 시작하는 사이로 친밀해졌다. 현태는 소설로 등단한적이 있는 작가였다. 한때는 소설을 열심히 썼으나 이제는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보라는 언젠가는 등단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할 뿐이었지만 현태는 그 꿈을 현실로 이뤄낸 사람이었기에 그가 멋있어 보였다.

 

둘은 소설과 소설가들에 대해 오래도록 얘기를 하다가 종종 자신이 꾼 꿈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꿈에서 세계의 종말을 겪었다든가 음악이나 단어의 상징이 나온다든가 하는 얘기였다. 보라는 소리가 시각화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보라의 꿈은 이렇다. 

나는 꿈에서 내 조카의 이름을 불렀으나 갑자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ㅇ과 ㅅ이 들어간 아름다운 글자였는데 혀를 아름답게 굴리면 나오는 부드러운 소리라는 것만 기억이 났다. 연성, 성연, 연수, 수영, 성우, 승우.. 어떤 글자의 조합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꿈이라는 무의식에서 깨어나 그 글자의 정체가 성연인 것을 떠올렸다. 무의식에서 나는 부드럽고 하얗고 푹신한 구름 사이로 떠돌아다니며 내 조카의 이름을 끝없이 조립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성연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성연은 내게 "이모, 하늘의 구름같이 폭신한 곳이야" 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급한 표현이라는 것을 나는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어도 그 무의식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찾기는 어려웠다.

 

현태는 보라의 이런 꿈 얘기를 주의깊게 들었다. 보라는 현태의 집중함과 사소한 관심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녀의 사소한 기억을 현태가 감싸안 듯이 보아주니 보라는 안정감과 깊은 애정을 느낀 것이다. 현태와 보라는 오래된 친구처럼 연인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사적이고 사소하고 쓸데없는 얘기를 오래 했다. 하지만 현태는 별안간 보라에게 등을 돌렸다.

 

현태는 데이트 전날 보라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무섭다고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현태는 보라를 이상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그는 그녀가 멘탈이 아주 바스라져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녀를 툭하고 아주 살짝만 건들여도 그녀가 사방으로 부서져 그 유리조각에 그의 발이 다쳐 피가 철철 흐를 것 같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보라가 그렇게 멘탈이 바스라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깊이 사랑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했는데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보라는 그를 곧 사랑하게 될 모양이었으며 그렇게 되면 보라는 그에게 집착하게 될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는 불행해질 것이었다.

 

보라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사실 보라는 그를 사랑할 것 같기는 했다. 그는 멀끔하고 키가 크고 똑똑하고 그녀의 말을 잘 들어줬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녀는 쉽게 사랑에 빠지니까. 아니, 그녀는 사랑에 빠질만한 구석을 너무 쉽게 발견하는 성격이니까. 그렇게 되면 그도 어쩌면 보라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을 테고, 아니 사실 그도 보라를 사랑할 준비를 마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성급히 보라를 밀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현태는 보라의 정서적 불안정함을 파악하자마자 그녀와의 만남의 싹을 잘랐다. 시작도 전에 싹을 아예 툭 잘라서 밟아버렸다.

 

 

 

로그아웃이란 전시를 봤다.

체험전시는 처음이었다.

체험이 별거 있겠냐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잘 꾸며놨다.

일상에서 로그아웃하는 시간을 만들어놓은 것인데,

쉴 때 중요한게 뭔지 생각하게 해줬다.

 

내가 본 전시는 가을전시이다. 

사계절 내내 전시를 한다고 한다. 그 계절에 맞게 한다. 

 

쉴 때 중요한 것은 이런것들이 필요하다고 한다. ​

 

시각적인 자유로움, 그리고 좋은 향기,

좋은 소리, 무엇보다 좋은 공간이다.

나는 요가를 해서 요가 수련할 때 하는

공간과 소리에 익숙하다.

자연에 가까운 소리, 그리고 싱잉볼, 인센스 스틱을 태우는 냄새.

이런걸 잘 구현해놨다.

 

전시회 공간은 4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테마는 사계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테마로 꾸며놓았다. 

여름의 바다에는 계속 앉아 있고 싶었다.

가을의 편백나무 조각들에서 나는 향기도 계속 맡고 싶었다.

그리고 쉼을 경험할 수 있는 작은 공간들도 있었다.

 

별을 바라볼 수 있는 작은 방 같은 곳은 너무 좋았다.

멍때리기 좋은 곳이었다. 정말 힐링이 되었다. 

 

향기를 맡아 볼 수 있는 곳도 좋았다.

같이 전시회 갔던 친구가

전시회에 만족했는지 저녁을 사주고

인스타그램에도 잔뜩 사진을 올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람이 많아서

한 곳에 2분 정도씩 머물도록 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오래 있고 싶었다.

 

장소는 뚝섬미술관이다. 미술관 자체가 되게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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