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하루종일 같이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미드 빨간머리앤을 보며 그녀가 지닌 감수성, 성장의 세계를 즐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소녀 앤이 겪었던 험악한 일들. 그리고 그녀가 그 삶을 겪어낸 후 토해내듯 말하는 언어들. 그 언어들은 험악했던 것에 비해 순화되고 미화돼 아름다웠다. 

 

그런 언어를 사용하는 앤을 사랑하게 된 나이든 아저씨, 아줌마. 그 사랑에 힘입어 새로운 가정이 생겨 행복한 소녀. 가정이 존재하지 않았다가 새로 가정을 얻어 행복함을 느끼는 것을 보면서 가정이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새로이 감사함을 찾게 되려나. 

 

그녀가 나 대신 세상의 일들을 겪고 나 대신 세상을 헤쳐나가고 나 대신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그런 마음에서 드라마를 열심히 봤다. 

 

내 인생을 앤 네가 좀 대신 살아달라는 회피적 마음에서. 

 

 

내 아름다운 고양이는 바닥에서 잠을 잤다. 침대가 아니라 바닥에 자리를 잡은 이유는 아마도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옷 때문일 것이다. 옷은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었지만 고양이에게는 공간 영역의 표시다. 고양이에게는 내 옷이 보금자리를 명확히 구분해주는 셈이다. 

 

옷이 쌓여져 있는 빨래더미 위에 포근하게 웅크리고 자고 있는 고양이에게 나는 “너는 내 침대에서 자도 되는 걸. 왜 바닥에 있니”라고 중얼댄다. 침대와 바닥의 차이가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듯이 침대 위에 올려놔도 다시 빨래더미 위로 기어간다. 그리고 다시 잠에 든다. 

 

그러나 나는 침대 위에 엎드러져 여전히 미드를 시청 중이다. 

 

‘내 옆에 웅크리고 누워서 내게 네 체온을 좀 전해주지. 나쁜 것’ 하며 

바닥의 고양이를 쳐다보고 깨워봐도 고양이는 눈만 슬며시 뜨다가 다시 잠에 든다. 

 

미드 7개를 보는 동안에도 고양이는 계속 내리 잤다. 엄마는 동물은 침대에서 같이 자지 말고 바닥에서 재우라고 했으나 그런 권고와 상관없이 고양이는 스스로 바닥의 빨래더미를 선택해버렸다. 

 

C.S.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어떤 인간들은 눈 앞에 펼쳐져 있는 바닷가를 두고도 그 앞에 진흙과 모래가 좋다며 그 곳에 뒹굴고 있다"고 인간세상의 모습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하다. 앞으로 한발자국만 가면 진흙에서 벗어나 바다를 즐길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여기가 천국이라고 계속 진흙에 있는 인간들처럼. 이상한 고양이. 

 

 

이상한 고양이는 신발장에도 종일 웅크리고 있다. 턱이 낮아 몸을 숨기기 좋아서인지, 신발에서 나는 냄새가 익숙해서인지, 신발장에 깔려 있는 돌이 시원해서인지 알 수 없다. 

 

‘왜 온세상에 나있는 더러운 길거리를 다 쓸고 온 신발이 그렇게 좋니. 신발에 붙어 있는 온 세상의 먼지로 뒤범벅돼 있는 신발장에 너의 몸을 맡겨 누워있니. 이상한 고양이야’. 나는 혼자 말을 건다. 

 

고양이는 몇 달 나와 함께 살면서 신분이 격상됐음에도 그는 그걸 알지 못한다. 나에게 고양이는 가족처럼 돼 있어 내게 어떤 짓을 하거나 나를 아프게 해도 난 그 성가심을 전부 다 받아들여줄 준비가 돼 있다. 

 

고양이는 바보다. 내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고양이는 내 발 주위를 한없이 서성이고 배회하며 내 발과 다리에 자신의 몸을 문지른다. 무릎 위에 올라와 자신의 머리를 부비고 내 품에 안겨온다. 그리고 내가 쓰다듬는 손을 깨물고 할퀸다. 

 

가엾은 고양이의 표현 수단은 고작 이것일 뿐이다. 깨물고 핥고 몸을 부비는 것. 고양이의 한정된 표현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내 고양이. 

고양이의 눈은 크다. 콧대는 없는 편이고, 코위에는 하트 모양으로 털이 없는 부분이 있다. 그곳은 온도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 아주 진한 빨간색이었다가 아주 연한 분홍색이 된다. 

 

고양이의 눈이 큰 편이라 그런지 고개를 숙이고, 발로 얼굴을 비비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청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세수를 저렇게 할까. 발을 오므려서 얼굴을 가볍게 만지는 데, 그 모양 자체가 매우 귀엽다. 

 

그리고 고양이는 가볍고 흩날리는 깃털 종류의 것들을 좋아한다. 휴지조각이나 깃털, 그런 비슷한 종류의 것들을 발견하면 왼발로 쳤다가 오른발로 친다. 그렇게 발로 치고 있는 것을 반복하다보면 휴지조각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그것을 또 고양이는 오랫동안 쫓아다닌다. 

 

 

고양이에게도 나름의 일과가 있다. 좁디 좁은 원룸의 이끝에서 저끝까지는 몇발자국도 되지 않지만 고양이에게는 어쩐지 엄청난 곳일테다. 신발장에서 책상앞까지 우다다다 뛰어왔다가 침대위로 점프를 했다가 다시 그곳에서 의자 위로 점프를 한다. 다시 신발장으로 달려간다. 신발장 앞에 있는 전신거울에 몸을 한번 쓱 본 후 다시 우다다다 돌아다닌다. 

 

고양이 자신의 하루의 일과 중 꽤 중요하다. 규칙도 있다. 달려나가면서 자신의 영역이 '자신'으로만 가득한지를 확인하는 작업일까. 바라보고 있자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는 행동을 몇번이고 며칠씩 반복한다. 

 

 

그 모습을 보면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도 가끔은 아무 의미없는 행동이지만 내 생활의 규칙이 돼 버려서 반복하는 것들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각을 확인한 후 "으아아아아아아아아"를 크게 외쳐 세상에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린다. 핸드폰 게임을 실행해 나의 농장이 잘 자라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고양이를 번쩍 들어올려 "냥냥아! 잘잤어? 너는 왜 내 발을 계속 물어뜯니? 대체 왜 그러는거야?"라고 말을 건다. 이건 날마다 반복된다. 고양이가 그저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나도 그냥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이제 8개월 된 내 아기 고양이는 자꾸 운다. 

 

원래 잘 울지 않는데 밤에 자꾸 애-옹 애-옹 거린다. 아무래도 이제 중성화 수술을 할 때가 온 것 같다. 

 

동물병원에 전화를 건다. "이제 8개월 된 아기 고양이구 남자앤데요. 중성화 수술 가능할까요?"문의를 하니 4시에 맞춰서 오라고 해서 고양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고양이는 태어난지 2개월만에 내 품으로 왔다. 분양소에서 두달을 지내다가 나한테 왔기 때문에 집 외에 고양이가 가본 장소는 없다. "고양이야. 강아지를 본 적이 있니?"

 

동물병원에는 강아지들이 많아서 엄청나게 짖는다. 내 고양이는 겁에 잔뜩 움츠렸다. 내 품에 파고든다.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고 숨어있다. 애기다. 정말 이렇게나 가엽다니. 

 

 

고양이가 불쌍하다. 중성화수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고양이 입장에서는 욕구가 사라지는 셈이다. 그렇지만 욕구를 살려두자니 나랑 함께 지내기는 더 어렵다. 

 

고양이가 중성화 수술을 하는 대신 나는 너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로 한다. "고양이야. 따뜻한 집과 안전함과 먹을 것을 죽을때까지 제공해줄게. 정말이야. 약속해." 고양이와 약속을 했다. 

 

불쌍한 고양이는 피검사를 마치고 마취제를 맞은 뒤 잠에 든다. 수술은 간단하게 끝났다. 집에 가서 청소를 해놓고 고양이의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뒀다. 아직 마취에 덜 깬 고양이를 데리러 다시 동물병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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