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본가에 살 땐 따로 알람을 맞춰놓지 않았다. 자기 전에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자면 그뿐이었다.

 

대전에서 홀로 살기 시작하자, 잠이 들면서도 믿을 구석이 없었다. 핸드폰 알람 10개에 눈을 떠야만 한다.

절대 지각해선 안된다고 잠이 들면 과도한 긴장 때문에 새벽에 자꾸 잠에서 깼고, 차라리 마음 놓고 자자고 하면 알람소리를 못 듣기도 했다.

 

"일어나 일어나"하던 그 시끄럽던 엄마의 소리가 있어 밤에 푹 잘 수 있던걸 여태껏 몰랐다.

나를 물면서 깨우는 아깽이녀석.


내 방에 새로 들어 온 작은 아기 고양이는 새벽 5시만 되면 나를 깨우기 시작한다. 

 

이불을 덮고 자다가 발이 이불 밖으로 나오면 그 발을 문다. 그래도 깨지 않으면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을 문다.

 

그러면 나는 이불 안으로 손과 발을 집어넣어 아기 고양이가 손과 발이 사라진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가 다시 손과 발이 이불 밖으로 삐져 나오면 고양이는 다시 물기 시작한다. 그러면 눈을 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나의 아기 고양이는 새벽 5시에 눈을 떠서 내가 일어날 때까지 물기를 반복한다.

 

내 손을 자꾸 깨무는 내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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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고양이가 무는 것이 감미로운 애인의 손길 같다가도, 어느 날은 좀 더 자게 내버려두지 싶은 잔소리쟁이 같기도 하다. 그러나 너무 물어대는 고양이의 버릇을 고쳐야겠다 싶었다.

 

내 손과 발이 상처투성이가 됐다. 인터넷을 뒤적 뒤적 찾아보니, 고양이가 물 때는 고양이 코에 딱콩을 때리거나, 몸을 흔들거나, 코에 바람을 넣으라는 조언이 눈에 띈다.

고양이가 내 손을 물던 어느 날, 나는 고양이의 뒷목을 잡고, 한 손으론 코에 '딱콩'을 했다. 엄지와 셋째를 동그랗게 말고 튕겨서 한대 쳤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고양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다시 내 손을 물기 시작했다.

 

내 손에 붙잡혀서 우울한 고양이.

다시 딱콩. 고양이는 다시 온 얼굴의 힘을 다해 찡그린다. 

 

뒷목은 내게 잡혀있고, 두 발은 필사적으로 얼굴을 막으면서 저항한다. 그러나 고양이는 내 손을 계속 물고 있다. 

 

다시 딱콩. 고양이는 또 모든 얼굴의 근육을 동원해 찡그리면서 내게 괴로움을 호소한다. "그러니까 물지 말란 말야" 중얼대지만 고양이는 한국 말은 알아들을 수 없다.

 

 

고양이가 한국 말을 배울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혼자 고민을 해봐도 고양이에겐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뇌 같은 건 없는 게 분명하다. 고양이 목에서 나오는 울음은 '야옹'이 전부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딱콩'밖에 답이 없는 걸까.

2018년 4월 내 고양이를 데려왔다. 이제는 고양이 없는 삶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2018년 내가 제일 잘한 일이 고양이를 데려온 것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기 고양이를 데려온 것. 내가 고양이를 발견한 것. 어쩜 나는 이렇게 완벽한 고양이를 발견했을까.

 

예쁘고 귀엽고 성격도 좋다. 예민하지도 않다. 사람을 좋아하고 야옹-야옹 울지도 않는다.

 삐지지도 않는다. 화도 안내고. 발톱을 잘라줘도 가만히 있는다.

 

 

문앞에서는 나를 매일 마중하러 나와있는다. 별명이 마중 고양이다.

 

잘때도 내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잔다.

 

그리고 화장실을 바꿔줘도 금방 적응한다. 사료도 잘 먹고 물도 잘 마신다.

 

고양이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덕목을 전부 갖췄다.

 

 

요새는 귀여운 버릇도 생겼다. 내 옆에 있다가 나한테 고양이는 손을 내민다. 내 온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쑥 손을 내밀어 내 팔위에 올려놓는다. 교감하고 싶은걸까? 우리는 대화도 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왜 자꾸 손을 내미는걸까? 나의 온도를 느끼기 위한 고양이의 귀여운 몸짓이다.

 

내게 고양이는 손을 올려놓는다. "내가 옆에 있는걸 까먹지 마시게. 나는 살아있는 동물이야. 나는 체온이 따스한 생명체니까. 나를 부디 잘 돌봐줘."

 

귀여운 아가. 응 알았다. 나도 너의 말랑말랑한 젤리가 좋아.

 

 

고양이를 사랑하는 눈길이 여럿 있다.

나도 항상 고양이를 바라볼 때 사랑스럽게 쳐다보지만 나라는 인간 1명을 빼고도 여러명이 더 있다.

 

내 친구들은 내 집에 놀러와서 고양이를 실제로 보고나면 예외없이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마치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이 아기 자랑을 위해 매일 아기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는 사람처럼 내 고양이를 자랑하게 되는데 이들은 그 자랑에 관대하다.

내 고양이는 절대적 귀여움과 절대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서 내 눈에만 이뻐보이는 것이 아니다.

내 고양이를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고양이를 예뻐한다. 내가 2년 전 쯤 고양이란 생물, 그 중에서도 내 고양이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그 땐 나도 고양이와 오래 시간을 보내기 전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고양이의 치명적 귀여움에 취약할 때였다.

 

 


고양이는 그 자체로 아주 귀여운 생물인데 그 중에서도 내 고양이는 갓 태어났기 때문에 더 귀여웠다. 갓 태어나서 2주밖에 되지 않은 고양이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그때는 고양이가 발로 얼굴을 부비는 것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등의 모든 행위에 깊은 사랑을 느꼈다. 내가 고양이의 매력에 취약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 때 나는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설렘이 강하게 느꼈다. 그 사랑은 몹시 강한 것이어서 나는 고양이를 데려오기 위한 60만 원을 선뜻 지불할 정도였다.

고양이는 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창조주의 창의력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며 속으로 중얼거리며 기도까지 올렸다. 고양이를 창조해줘서 감사하고 고양이를 내게 줘서 감사하다며.그 때 느꼈던 첫 만남의 사랑과 설렘은 지금은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고양이를 잔잔한 마음으로 사랑한다.

 



어떤 새로운 사람은 그 강한 사랑과 설렘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이는 내 고양이를 만난 뒤 내가 초기에 보여줬던 깊은 사랑과 설렘을 보여줬다. 고양이에게 아직 취약한 인간들이 그렇듯이 낯선 이도 고양이라는 생물 자체를 향한 감탄과 찬사와 함께 그 가운데서도 특히 ‘내 고양이’만이 갖는 어떤 특별함을 향해서 사랑을 보내왔다.

내 고양이를 사랑하는 친구는 여럿 있지만 3명 정도는 내 고양이를 매우 사랑하고 있다. 3명의 공통점은 집에 놀러와서 내 고양이와 오랜 시간 논 뒤, 그 다음날 사랑을 이기지 못해 다시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손에 간식을 사들고 다시 찾았다. 고양이가 그렇다. 매우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고양이 카페가 장사가 잘 되는 거겠지.

가장 큰 사랑을 보여준 친구가 있다. 그는 자신의 고오급 카메라와 편의점에서 파는 각종 고양이 간식들을 들서는 내 집을 재방문했다. 그리고서는 카메라로 고양이 사진 몇십장과 동영상을 잔뜩 찍어간 뒤 마치 자기 고양이를 자랑하듯이 인스타그램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고양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인스타그램에 업데이트를 했다.

 

 



내 고양이는 품종이 먼치킨(과 어떤 잡종이 섞인 잡종)인데다가 아직 어리고 팔팔해서 사람을 잘 따른다. 낯선 사람이 오면 여느 고양이처럼 숨지 않고 개처럼 킁킁대며 낯선이를 탐색하는 데 바쁘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롭고 낯선이에게도 마음을 열고 머리를 부빈다.

내 고양이의 이런 행동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자라나게 하는 것일까. 고양이를 향한 사랑의 눈길들이 늘어날수록 고양이는 더욱 사랑스러워진다. 사랑을 많이 받는 생명은 경계하거나 폭력적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만큼 더욱 사랑스러워지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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