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나 고양이나 영혼이 없는 그냥 동물일 뿐이야. 난 동물 안 불쌍해."

 

내가 고등학생일 때 했던 말이다.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강아지 한마리가 불쌍하게 도로위에서 길을 건너고 있었다. 다들 불쌍하다고 입을 모았는데 나는 안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동물은 동물인데. 라는 생각이었다.

 

 

작년부터 고양이를 키우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물론 고양이한테 영혼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랑은 다르니까. 그냥 동물일 뿐이지만 불쌍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너무 좋다. 가끔은 정말 오바스럽게도 고양이 때문에 마음이 아플때도 있고 마음이 어떤 사랑으로 가득 차는 느낌도 받는다.

 

고양이한테 영혼은 없다고 해도 이런 얘기도 있다. 고양이가 죽고 나서 내가 죽으면 천국에서  고양이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거다. 심지어 cs루이스는 나니아연대기를 집필한 작가기도 하고 기독교인인데 키우던 강아지를 천국에서 볼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 성경을 다 뒤졌다. 동물과 천국에서 만날 수있는 가능성을 알고싶어서 말이다.

 

내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든 생각은 고양이랑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양이에게 말을 가르쳐보고 어떤 훈련같은 것을 해보았다. 소통을 하고 싶어서. 그런데 전혀 불가능했다. 고양이의 뇌는 나랑은 다르고 언어화한다거나 하는 능력이 없다. 동물이니까. 그래서 진심으로 한동안은 좀 슬펐다. 고양이가 너무 좋은데 고양이랑 얘기를 못한다는 것이.

 

고양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는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가 다 귀여웠다. 세수를 하는 것도, 그루밍을 하는 것도,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 하나하나가 귀여워서 다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막 사진을 찍을만큼 생소하게 귀엽지는 않다. 이제는 귀여운것보다 나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랑 딱 붙어있다거나, 나에게 달려와서 안겨있거나. 나를 지그시 보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한테 안긴 고양이.

 

고양이가 아플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고양이가 아픈적이 두어번 있었다. 한번은 무슨 음식을 잘못 먹고 토하고 설사를 했다. 그때는 정말 겁이 났다. 내가 느끼는 마음을 통해 아주 살짝 부모의 마음도 느꼈다.

 

한번은 고양이가 비뇨기과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양이를 위해서 100만 원도 선뜻 낼 수 있을까. 그 결심을 하는데 하루정도가 걸렸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하겠다는 결심이 서는데 말이다. 진짜 자식이면 달랐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실제로 그런 큰 돈은 들어가지 않았고 고양이는 건강해졌다.

 

나는 컴퓨터하는데 너는 턱을 괴고있네.

 

중요한 일을 해야할 때는 고양이를 떠나있는다. 고양이랑 놀다보면 자꾸 현재에 갇히게 되는 느낌이 든다. 지금 현재가 제일 좋아. 내일은 없어. 이런 느낌이 든다. 나는 급한 것을 빨리 해야하는데 말이다. 실제로 고양이가 시간을 의식하고 있는 방식과 나의 방식은 매우 다를 것이다. 나는 하루가 지날수록 더 나은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고양이에게는 그런 희망이나 바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양이가 동물인 것이 좋다고 느껴진다. 소통을 하지 못해 슬퍼했던 날은 뒤로 한다. 고양이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거의 없다. 화장실 치우기, 제때 밥이랑 물 놓기 정도다. 밥이 맛이 없다는 투정도 없고 혼자 맛있는 거 먹는다고 삐지지도 않는다. 그게 너무 좋다.

 

고양이는 정말 덩치가 빠르게 커진다. 얼마나 더 클까 궁금하다.

 

아깽이일때 조그맣다.

 

고양이 관련 동영상, 책, 글을 많이 보게 된다. 내 고양이만 이럴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다. 그냥 다른 고양이는 어떨지 궁금한 정도에 그치긴 한다. 행동을 취하거나 동물보호운동 같은 것보다는 다른 고양이들도 매우 귀여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궁금하다.

 

고양이는 정말 겁이 많고 호기심도 많다. 고양이는 자다가도 내가 비닐봉지를 뜯으면 아주 빠르게 달려온다. 그리고 아주 먼데서 큰 소리가 나면 겁이 나서 빠르게 숨어버린다. 고양이의 이런 엄청난 행동력을 볼때면 게으른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고양이는 항상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하루종일 내 품안에 안겨있는 시간은 20분 정도다. 20분이 지나면 쓰다듬을 다 당했으니 도도하게 사라진다. 항상 나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어느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있다.

 

잘때도 내 다리에 등을 기대는 정도로 스킨십을 한다. 다리를 내 몸에 대고 있는 정도다. 완전히 안겨있거나 푹 감싸지는 것은 별로 안좋아하는 것 같다.

 

고양이는 점프력이 굉장하다. 수직생활을 좋아한다.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고양이는 실제로 공간이 나뉘어있지 않아도 구분된 곳을 좋아한다. 실제로 나뉘어있지 않은 공간이지만 테이프로 사각형 테두리를 만들었거나, 수건이 펼쳐져 있거나, 시각적으로만 표시가 돼 있어도 그 안에 들어가있기를 좋아한다.

 

 

숨어있는 고양이는 부스럭거리는 장난감 소리에 뛰어나온다. 아니면 간식을 뜯어서 냄새로 유인하면 된다.

 

내가 음식을 먹고 있으면 달라는 의미로 애교를 부린다. 내 손이나 발에 자신의 머리를 계속 부빈다.

 

 

 

고양이가 눈 앞에 있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종종 있다. 내 고양이는 주로 머무르고 있는 곳이 정해져있다. 캣타워 꼭대기, 그리고 의자, 침대 머리맡, 창가의 서랍장 위다.      

 

가끔 숨어있기도 하는데 장롱 안에 숨거나, 장롱 위를 뛰어올라가 천장에 숨는다. 정말 점프실력이 대단하다. 어떻게 천장까지 뛰어 올라가는 건지 모르겠다. 자신의 몸에 10배가 넘는 높이인데.      

 

나는 가끔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서랍장 위에서 고양이를 슬쩍 본 것만 같다. 그래서 고양이야, 이리와봐, 라고 말을 거는데 다시 살펴보면 서랍장 위에 고양이가 없다.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를 하다가도 고양이가 캣타워 위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착각할 때도 있다. 주로 캣타워 위에 고양이가 있기 때문인데 언제나 그렇듯이 고양이가 있을 줄 알았다가 캣타워를 다시 보면 고양이는 없다.      

 

화장실에서도 변기에 앉아있으면 고양이가 문밖에서 나를 쳐다보고만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정말 있을 때도 자주 있지만 없을 때도 있다. 그런데 나는 고양이를 본 것 같다. 이상한 일이다.      

 

 

아는 사람은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는데, 방에서 누워있었다가 강아지가 내는 발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강아지가 늘 내던 발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착각인지는 몰라도 강아지가 내게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런데 무서운 게 아니라 강아지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서 가만히 발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에게 강아지의 발소리가 들렸던 건 그렇게 믿고 싶어서였을까. 강아지가 아직 내 곁에 있다고.      

 

나도 고양이가 늘 나를 쳐다보고 있다고 믿고 싶은 걸까. 가끔은 정말로 이상하다. 고양이가 빠르게 돌아다녀서 그런건지.

 

하루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고양이가 안보였다. 고양이가 주로 머무는 장소를 집안에서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찾았다. 아무데서도 보이지가 않아서 정말 이상했다. 집 문을 열거나 창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디있는 걸까.  고양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흔들고 간식을 꺼냈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순식간에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크게 다가왔다.

 

밖에 나가서 근처에 있던 아저씨한테 “혹시 고양이 못보셨냐”고 묻기도 하고 집 밖에 나가서 고양이 간식을 놔뒀다. 혹시 나갔으면 돌아오라고.       

 

 

집에 들어오니 고양이가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공포심이 들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그래서 집안을 샅샅이 다 찾았지만 안보였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 고양이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단체가 있을까, 어디에 신고를 해야하나 등등의 생각을 다 했는데 고양이가 집에 있었다. 집에 숨겨진 비밀장소라도 있는 걸까.       

 

고양이는 정말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순식간에 없어진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고양이는 어느새 햇빛과 그림차처럼 늘 있는 생명체가 됐다. 그저 늘 있는 햇빛처럼, 늘 있는 그림차처럼, 그렇게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늘 있는 한폭의 풍경처럼.

     

항상 의식하지는 않지만 항상 눈에 띄는, 그런 햇빛과 그림자처럼 고양이는 내 공간에서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최근 악몽을 꾸고 있다. 회사에서 부서장이 바뀌었는데 온지 얼마 안되서 그런지 엄청나게 기선을 잡고 있다. 말이 기선을 잡는 거지 못살게 굴어서 안달이다.

 

내가 꾸는 악몽은 뭐냐면, 바로 회사에 출근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꿈 속에서 회사 부서장에게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진다. 며칠을 잠을 못잤다. 잠을 못자니까 얼굴에는 뭐가 잔뜩 올라왔다.

 

엄마 아빠는 내 얼굴을 보고 많이 피곤하구나, 하면서 불쌍하게 쳐다봤다. 잠에 푹 못드니까 삶의 질이 확 떨어진다. 너무 피곤하다. 신경질이 난다.

 

 

내 발 밑에서는 항상 고양이가 웅크리고 잠을 잔다. 내 다리를 자신의 베개로 삼아 온 몸의 힘을 내게로 쏟고는 잠을 잔다. 고양이는 항상 내 다리에 자신의 몸을 딱 붙이고 내게 기댄다. 3kg이 넘는 고양이의 무게가 내게 실리는 것이 좋았다가 요새는 좀 싫어졌다.

 

고양이는 아마도 어떤 온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 같다. 왠지, 고양이가 내게 몸을 기대는 행위가 나의 온기를 느껴서 본인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양이도 너무 외로워서 그러는 것 아닐까 싶은 마음이었다.

 

언제나 나는 고양이가 그런 마음으로 내게 온 몸을 기대어서 잠에 드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고양이를 냅뒀다. 아니, 사실 냅둔 것뿐 아니라, 자기전에는 항상 고양이를 불렀다. "고양이야, 이제 자야 돼. 얼른 와, 나 이제 잘건데. 어딨어?"하고서는.

 

 

그런데 악몽을 꾸기 시작하니까 고양이의 무게가 어쩐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고양이가 내 다리에 기대고 있으면 "야, 너 몇키로인지 암?? 너 3kg도 넘는 것 암?? 개 무겁다고.."하면서 툴툴대다가 다리를 빼버렸다.

 

당황한 고양이. 고양이는 안식처를 찾지 못해 다시 이리저리 고개를 둘러보다가 다시 내 다리로 기어들어온다. 온기를 느껴야만 잠에 들 수 있는 것처럼, 고양이도 무척 외로워 보인다.

 

고양이 당황쓰.

 

컨디션이 너무 안좋아서 다리를 몇번 치웠더니 고양이가 내 다리를 안식처로 삼지 않는다. 대신 고양이는 어떤 캄캄한 곳으로 갔다. 그곳은 내 방에 있는 장롱 천장이다.

 

 점프실력이 엄청나게 늘어서 장롱 천장까지 뛰어올라간다. 그런 다음에 그곳에서 나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잠에 든다.

 

나는 이제 악몽을 꾸지 않는데, 고양이의 안식처가 바뀌어 버렸다. 너무 슬프다.

 

 

 

 

2개월된 고양이(왼쪽)와 1년 6개월된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고 있다. 애교부리는건 시간이 지나도 똑같다.

고양이는 너무 작고 약하다. 고양이가 가끔 내 팔을 물 때, 나는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는다. 그리고 혼내는데 고양이는 겁을 잔뜩 집어먹는다. 만약에 내가 손에 힘을 더줘서 목덜미를 아주 세게 잡으면 고양이 목은 부러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는 정말 자그맣다. 정말 작고 약한 존재다. 나는 그에 비해 아주 크고 힘이 세다. 

 

이 작은 아이가 계속 잘 살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보여주는 사랑과 내 책임감이다. 내가 그것을 저버리면 고양이에게는 정말 큰일이 나는 것이다. 이것은 갓 태어난 아이에게도 해당되는 것일 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이는 어른이될 때까지 자라야 하는데, 그 성장과정에서 부모가 사랑과 책임을 저버리면 아이는 죽거나 제대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2개월 된 고양이(왼쪽)와 1년 6개월 된 고양이(오른쪽). 이 포즈는 시간이 지나도 똑같이 취한다.

고양이는 나에게 자주 안겨온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노트북을 하는데 고양이는 하루에도 몇번씩 내 무릎위로 올라온다. 그리고는 쓰다듬어달라고 한다. 쓰다듬으면 골골댄다. 내게 안겨서 만족한다는 의미로 골골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꼭 이 고양이의 부모가 된 느낌이 든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어떤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밥을 주는 것도, 물을 주는 것도 화장실을 치워주는 것도 내가 한다. 이것도 고양이에게 필수적이니까. 나는 부모가 된 적도 없지만 어떤 존재를 책임진다는 것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주 연약하고 작은 존재가 성장하는 것을 돕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1년6개월 고양이가 누워있다(윈쪽), 2개월된 고양이가 자고 있다. 눕는 모양도 똑같다.

고양이는 물론 계속 고양이로 남을 것이다.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란다. 아이에서 자라난 성인은 한 명의 몫을 해내게 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그것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켜보는 부모는, 어쩌면 자식을 그 존재 자체로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시간을 다 넣은, 시간과 사랑을 다 넣은 존재로써, 그리고 또 자식이 살아갈 앞으로의 그 시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계속 행복을 빌어주는 것처럼. 

 

이런 말이 있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서 철이 들고, 여자는 아이를 낳고 철이든다는 말. 어쩌면 이 말은 남자는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여자를 만났기 때문에 책임감으로 인해 철이 드는 것이고, 여자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지켜주려는 책임감에서 철이 든다는 말 같기도하다. 

 

2개월된 고양이가 1년6개월된 고양이로 이렇게 컸다. 눈색깔은 파랑색에서 노랑색이 됐고 색깔은 더 진해졌다.

고양이와 같이 살면서 내가 경험한 적 없는 부모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습다. 하지만 우습게도 고양이가 이만큼 많이 큰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언제 이렇게 많이 컸니, 정말 신기하다. 쑥쑥 크는구나"라고 말하면서 마치 고양이를 내가 키우고 기를 부모가 된 냥 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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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나와서 앉아서 바라보는 동네의 풍경이 좋다. 집에만 있으면 우울해진다. 내 집에는 나의 고양이도 있는데 말이다. 나는 고양이와 함께 잠에 든다. 고양이는 잠들어 있는 나를 좋아한다. 움직이는 나에게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도 내가 잠에 들어 가만히 있으면 꼭 내 옆에 온다.

 

고양이와 함께 있으면 고양이가 지니는 감정과 나른함이 내게 전해진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고양이를 계속 쓰다듬고 있을 뿐이다. 고양이는 내게 나른함을 준다. 그것은 좋기도 하지만 어떤 무기력함과 우울함도 준다. 고양이는 현재, 현재, 현재, 그리고 현재에만 사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사랑하는 고양이는 몇개월째 같은 사료를 먹어도, 몇개월째 같은 장난감을 갖고 있어도 그것에 실증을 내지 않고 그것들을 너무 좋아한다. 언제나 격한 반응을 보이면서 좋아한다. 특히 고양이에게는 애착 장난감 같은 애착 낚시대가 하나 있다. 원래는 깃털도 달려있었는데 고양이가 물어뜯어서 없어졌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그 애착 낚시대를 고양이는 너무 좋아해서 낚시대를 입으로 물고 다니고, 그 옆에서 누워 있다가 배를 까 뒤집는다. 

 

나는 낚시대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기만 해도 고양이는 사정없이 달려든다. 한번 누으면 몸을 일으키기 힘든 나와는 반대로, 어떤 편한 자세를 취해 자리를 잡고 있어도 고양이는 낚시대의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몸을 일으켜 아주 빠르게 달려든다. 이것은 정말 오래된 놀이이고, 아주 반복적인 행동인데도 고양이는 언제나 그렇듯이 아주 잽싸게 움직인다. 정말 신기하다. 고양이에게는 현재는 현재일 뿐이고, 과거와 비슷한 현재도 늘 재미있다. 반복적이어도 새롭지 않아도, 고양이에게는 현재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양이에게는 미래를 위한 현재도 없다. 미래의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양이에게 현재는 현재로서만 존재한다.

 

이런 지점에서 고양이와 함께 있으면 우울감이 살짝 드는 것이다. 나는 현재를 바로 이 지점에서만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를 과거와 이어져오는 지점에서 보고, 미래를 나아가는 지점에서도 바라본다. 나는 세계에서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공간적 측면에서도 나를 바라보고, 내 일생의 끝을 보는 지점에서도 30대의 나를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여러 측면에서 현재의 내가 해야할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늘 현재로서의 현재만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과거로부터의 나를 생각하면서 한없이 우울해질 때도 있다. 과거의 나를 자책하고 미워하고 용서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좋았던 것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또 미래지점에서의 현재를 바라보면서 가끔은 채찍질을 하기도 한다. 미래 지점에서바라보는 나는 더욱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서 나의 가치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해야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한다. 공간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곳은 한없이 작은 것만 같기도 하다. 가보지 못한 대륙, 바다,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싶기도 하다.  또 죽음에서 바라보는 나의 영혼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종종 고양이와 떨어져 나와서 카페에 온다. 카페에서는 여러 사람 사이에 있는 나를 보면서 사회 구성원으로써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여러 지점에서의 현재를 살아낸다. 특히 미래 지점에서의 현재를 살다가 다소 피곤해지면, 내게 충실한 현재를 사는 고양이 곁으로 와 힐링을 한다. 

 

내 귀여운 고양이는 그림자를 좋아한다. 흰 벽에 까만색 그림자가 일렁이면 그것을 쫓기에 바쁘다.

 

정말 실체인 내 손가락은 안보고 그림자만 쫓아다닌다. 흰 벽에 유난히 까만색 그림자라서 그럴까.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쫓아다니는 것이 바쁘다.

 

 

밤에 불을 꺼놓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내 배 위에서 고릉고릉 대면서 누워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양이가 바삐 움직인다.

 

바쁘게 무언가를 쫓아다닌다. 핸드폰 빛 때문에 흰 벽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쫓는 것이다. 내가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핸드폰을 갖고 노니 손가락 그림자를 쫓아다닌다.

 

 

고양이가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볼 때가 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고양이 눈에는 세계가 3차원이 아니라 2차원으로 보이는 걸까. 부피감이 있고 실체가 있어야 진짜라고 느끼는 인간과는 다르게 고양이는 모든것이 평면으로 보이는 걸까?

 

지치지도 않고 그림자를 쫓는다.

 

나는 밤에 잠들기 전에 불을 끈 채로 핸드폰 조명을 켜 고양이와 그림자 놀이를 하다가 잠에 든다. 고양이는 그렇게 하루의 끝을 함께 하고 있다.

 

내 삶의 시간들에 속속 들어와있는 고양이 덕분에 나는 또 쓸데없이 2차원과 3차원을 생각하다가 그 너머의 진실은 뭘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고양이와 같이 산지, 이제 만5년이 되어간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고양이는 아직도 아기같다.

따다다다 온 집안을 걸어다니고 내 무릎위에 올라와서 잔다. 먹고 배변하고 잔다. 지겹지도 않은지 매일 비슷한 생활을 반복한다. 

 

고양이가 내 삶에서 익숙해진만큼 나는 모든 것이 관성이 됐다. 맨 처음에 느끼던 설렘과 귀여움, 우와 하던 미칠 것같은 사랑스러움이 이제는 익숙함이 됐다. 

그 사이 내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몇명은 늘어났다. 

같은 동네 아는 언니는 내가 여행을 가는동안 고양이를 봐줬다. 일주일도 안되는 시간동안 그 언니는 내 고양이를 사랑하게 됐다. 아니, 그 언니는 고양이가 본인을 그리워하지 않느냐고 했다. 분명 고양이가 자신을 엄청 잘 따랐다고. 분명히 그리워할거라고 했다. 

 

내 고양이는 나를 인식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 나만 졸졸 쫓아다니기는 한데, 여행을 다녀와서 보니 낯설어하는 것을 보면 또 모르겠다. 그리고 아는 언니에게도 쉽게 곁을 내주는 것을 보면 또 모르겠다. 

 

고양이에게 내가 원앤온리같은 사람일까. 내가 고양이를 익숙해하는 만큼 고양이도 이제 나를 익숙해하는 걸까. 

영화 타샤 튜더를 보면, 엄청나게 큰 정원을 가꾸는 할머니가 나온다. 이 할머니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웰시코기들을 키우고 그림을 그리면서 살고 있다. 여기서 나는 의문점이 들었다. 웰시코기들을 50년 동안이나 키웠다는 것이다. 

 

코기들의 수명이 몇년이길래. 타샤 튜더 할머니는 웰시코기들을 매우 좋아했지만 그들이 죽으면 또 새로 들여오고 그랬던 것 같다. 마치 장미꽃이 좋으니까 죽으면 또 새로 심는 것처럼. 아마 그 할머니에게 웰시코기들은 one of them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아는 많은 고양이집사들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고양이가 죽으면 또 새로 들여와서 또 키우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 고양이가 내 하나밖에 없는 고양이니까. 고양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마음 아파하면서 힘들어한다. 그리고 다시는 고양이를 키우지 않아야지 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고양이를 one and only라고 생각해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고양이에게도 내가 one and only일까. 아니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슬렁거리는 밥주는 인간하나인 것은 아닐까. 가끔 궁금하다. 

 

나의 아기 고양이가 밤에 잠이 들때면 내 머리맡으로 온다. 원래는 내 발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머리맡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베게를 베고 눕는다. 내 고양이는 내 베게 옆에 자리를 잡은 뒤 몸을 웅크리고자려고 한다.

 

내 아기 고양이는 내 손에 비스듬히 누워 온기를 전해준다. 고양이에게 필요한건 내 손 면적 정도의 온기면 충분하다. 고양이는 그보다 더 많은 온기도 필요하지 않고 딱 그정도면 된다.

 

요새 고양이에게 신경을 못썼다. 원래는 퇴근한 뒤 의자에 앉는다. 그러면 고양이는 내 무릎 위로 뛰어올라 반갑다면서 머리를 부빈다. 그러면 나는 "고양이 안뇽. 잘 있었어 이쁜아."라고 중얼대면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뽀뽀를 해준다. 그 시간은 불과 20분도 되지 않는데 최근에 나는 짜증이 난다면서 그 20분을 고양이에게 주지 못했다.

 

고양이는 하루종일 혼자 있어서 외로웠는지 퇴근한 내 발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쓰다듬어달라고 머리를 부볐는데 최근에는 내 연애사가 너무 망해버려 고양이가 눈에 안들어왔다. 불쌍한 나의 아기 고양이.

 

고양이가 그토록 많이 외로워서였던지, 잠자리를 바꿔버린 걸까. 내가 쓰다듬어주지 않으니, 발밑에서 내 머리맡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은 뒤 여기에서라도 나와 함께 하고 싶었던걸까. 나의 숨을 가까이에서 듣고 내 팔에 몸을 기대면서 이렇게해서라도 하나뿐인 가족에게 몸을 누이는 걸까.

 

 

어젯 밤에는 내 머리맡에 자리를 튼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너는 엄마 아빠가 없지. 네 부모는 어디있니. 나도 널 데려올때 네 부모를 보지 못했는데."라고 말하다가 내가 너의 엄마가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고양이가 갑자기 천상 고아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고양이에게는 나밖에 없는데. 불쌍한 내 아기 고양이에게 너무 신경을 못써줘서 미안한 마음이 가득 들었다. 나는 내 아기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그만하라고 할때까지. 내 털뭉치 애기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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