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연애, 그러니까 혼자만의 연애를 생각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썸'이 많은 편이었다. 연애는 적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장면들, 남자가 내게 잘해주는 것과 그것에 설레는 나 자신을 보는 장면이 떠오를 때면 나는 내가 아주 더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남자들의 얼굴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다. 난 왜 이다지도 쉽게 내 마음 속에 그렇게 많은 남자들을 들여왔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말 내 마음에만 들어왔다는 것이다.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남자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 자체로도 나는 정말이지 괴롭다. 

아, 내가 마음을 줬던 그 시간만큼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라고 그 시간만큼의 사랑이 또다시 지나간다. 

 

그 시간 내게 사랑을 선사했던 그 무수한 남자들은 그 시간만큼의 사랑을 줬고 나는 그들을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회사에서도 어떤 남자를 좋아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도 나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는 아주 많이 나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정도, 나를 귀엽다고 느낄 정도, 나의 이러저러한 요구를 들어줄 정도,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줄 정도로만 나를 좋아했다. 

 

그는 열렬한 사랑을 보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냥 그 정도의 간단한 좋아함을 보냈지만, 그 정도의 달달함도 내겐 충분했다. 그런 달달한 감정이 묻어있던 그의 얼굴 그의 눈 그의 목소리 같은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이상해진다. 그는 종종 회사에서 내곁을 지나간다. 당연하다.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고 그냥 그는 그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회사에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그럼에도 그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서로를 서로의 무엇이라고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공간의 같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댔고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내 어깨에 가끔 안겨왔고 나도 그를 쓰다듬어줬다. 나는 그에게 힘들다 했고 그도 내게 힘들다 했다. 

 

아주 가끔 우리는 술을 마셨는데, 그는 내게 "평소에는 싸가지없게 굴더니, 술 마시면 애교부려서 귀엽네. 자주 멕여야 겠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먹으며 오므려지는 입술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자신도 술을 들이키는 것이다. 

 

우리는 나란히 놓여진 책상에 나란히 앉아 근무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이 아주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며 오래 그를 쳐다보았고 그도 나를 쳐다봤다. 나는 누군가 좋아지면 그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는데 그것은 그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린 일을 하다말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한 어떤 시간도 가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장면들은 완전히 잊고 있었고,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그에게 차였으며 엄청나게 울어댔다. 울고 욕을 하고 난리를 치다가 또 몇달이 훌쩍 지났기에 그를 완전히 잊고 생각하거나 떠올리지도 않았다. 

오늘은 어쩐일인지 문득 그 장면장면들이 고스란히 마음에 떠올랐다. 이유가 뭘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것이라고 정의내린 적도 없고 사랑을 속삭인 적도 없고. 그러니까 정말 아무것도 없었는데. 

 

차라리 내 전남친,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가 서로의 연인이라는 공식적인 관계를 맺은 뒤, 이제 우리는 아무 관계가 아니라 다시 공식적 관계를 내린 그 관계가 끝나자 왜 그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서 일어났던 그 장면이 떠오른 것일까. 대체 왜. 

 

그 장면과 이 장면이 떠오르며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 그러니까 매우 설레고 좋아한다는 그 감정은 여전히 같은 종류로 나를 감싼다. 그것은 누구 때문인가. 그것이 특정한 어떤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쉽게 좋아하고 설레하다니, 나는 내가 몹시도 더럽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나는 내 마음을 너무 쉽게 그들에게 맡긴 것이다. 정말 너무 쉽다. 나는.  

 

아침에 추워서 편의점에서 핫팩을 샀다. 그가 내게 집이 춥냐면서 불쌍하다고 침낭을 하나 주고 핫팩도 잔뜩 사다주겠다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나서 울컥했다. 그는 나를 안쓰럽게 보고 불쌍하게 여겼으며 자신이 도와줄 것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말에 담긴 애정이 그리웠던 건지, 핫팩을 들고 지하철로 출근을 하는 내내 우울함이 밀려들었다. 이런 따뜻한 애정의 순간이 더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느끼는 우울함과 슬픔도 깊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짧은 기간을 사귄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화가 나는 것은, 생각이 들수록 그가 생각보다 더욱 괜찮은 사람이라는 점에 있다. 내가 이만한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하게도 딱 마주치게 되는데 어떻게 우리가 만나게 됐을까, 싶은 것이다.

나는 그와 내가 아주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정말 비슷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가 나를 향해 가졌던 생각과 마음이 그저 순수하게 애정과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내 자신이 싫어진다.

나는 바보같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랑인가,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에는 얼마나 큰 힘이 있는가를 항상 따져봤다. 그런데 모든 것이 끝난 뒤 그것이 그저 순수하게 애정과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내 자신이 매우 싫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원망하는 것에 더해 슬픔이 마음 안쪽으로부터 차오른다.

슬픔은 마음 안쪽으로부터 차올라, 태초에 바다가 생겨나듯이, 물이 고이고 고여 깊어지고 깊어져 거대한 바다를 만들어 수면이 찰랑대는 것처럼, 내 슬픔도 차오르고 차올라 그것이 눈물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관찰하다가 점심시간에 밥을 안먹고 눈물을 흘렸다. 내 눈물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다. 눈물로 감정이 표현되는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는 얼마간 울다가, 흘린 눈물만큼의 슬픔이 내 마음에서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진정이 됐다. 하지만 나는 비참하게 구걸을 하고 싶어졌다. 마치 나를 비추는 사랑은 그 혼자 소유하고 있는 냥, 난 그에게 다가가서는 다시 그 빛을 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다시 한번만 생각을 바꿔줘 제발.

이것은 어찌보면 사랑놀이를 한바탕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엇을 그토록 대단한 그 무엇을 했다고. 나는 사랑의 기간보다 더 오랜 기간을 슬픔에 빠져있는가 말이다.

난 다시 한번 카톡에 들어가 사진으로 그의 얼굴을 본 뒤 그가 여전히 귀엽다고 느꼈다. 예전에는 이 얼굴을 내가 만지고 뽀뽀하면서 귀여워했었는데 이제는 없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더 우울해졌다. 그런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시절의 감정을 느꼈던 날들도 그리운 날도 오겠지.

 

제가 좋아하는 고양이를 소개합니다.

 

제 고양이는 주인을 생각해서 마스크를 갖다주기도 합니다. 보통 고양이가 주인이라고 하고 인간이 집사라고 하지만 제 고양이는 충성스러운 강아지에 가깝다고 할까요.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주워다주고 있을 뿐 아니라 한번도 하악질을 한 적도 없고 할퀸 적도 없어요. 떼를 쓴적도 없고 충성스럽게 기다리고 있는 착한 아이에요.     

그리고 애교도 많습니다. 항상 제가 집에 들어오면 집 앞에서 저를 마중나와 있어요. 저 뿐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 와도 누구든지 반갑게 맞이해줍니다.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한테 친근하게 구는 녀석입니다. 애교도 잘 부리는 애교쟁이에요. 제가 의자에 앉으면 제 무릎에 따라 앉고 머리를 부빕니다. 

제 품에 안겨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는 시간이 고양이에게는 필요합니다. 하루에 20분 정도는 제 온기를 나눠줘야 해요. 아직 3년밖에 안 된 작은 고양이라서 그런건지, 사람으로 치면 20대성인이기도 하지만 고양이는 아직도 아기입니다. 따뜻하게 포옹해줘야 하는 시간을 고양이는 너무 좋아합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20분이 지나면 스르르 사라집니다. 자신만의 공간으로 가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제 공간의 한 곳을 차지하는 아주 중요하고 사랑스러운 생명체입니다.     

 

고양이는 발라당 누워서 애교를 부리고 귀여워해달라고 합니다. 혼자 있는 것을 외로워하는 모양인 것 같습니다. 제가 집 밖으로 나갈 것 같은 기색을 보이면 항상 저렇게 배를 까뒤집고 귀여운 척을 하면서 가지말라고 합니다. 이럴때는 마음이 살짝 아프기도 합니다. 동생을 데려와야 할까, 는 생각이 들기도합니다. 하지만 제 고양이는 늘 조용합니다. 야옹, 하는 소리를 3년 동안 10번 정도밖에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너무 아프거나 너무 놀랐을 때만 야옹, 하고 소리를 냅니다. 침묵을 좋아하는 고양이에요.

고양이는 예쁘고 착하고 조용하고 사람을 잘 따릅니다. 고양이에게는 팬이 많습니다. 제 친구들중에는 고양이를 보러 제 집에 놀러오는 친구들도 몇 명 있습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제 집에서 만나는 장소를 정하는 것은 한가지 이유 때문이죠. 고양이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어린 팬은 제 4살 조카입니다. 제 조카는 고양이와 노는 시간을 항상 기다리고 있어서 식사를 건너뛰고 싶어합니다. 밥을 그만먹고 야옹이랑 놀고 싶어, 라고 말하면서 이모 밥을 이제 그만 먹어, 라고 조르기도 합니다. 고양이와 제 조카는 2018년 1월에 태어났는데, 어떻게 보면 사실 동갑입니다. 둘은 친구이기도 하지만 고양이의 삶이 훨씬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고양이의 나이가 훌쩍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양이가 제 조카랑 잘 놀아주는 셈이겠죠. 제 조카도 짓궂게 군적은 없고 야옹이를 관찰하고 쓰다듬어주고 쉴새 없이 물어봅니다. 야옹이는 왜 꼬리가 있어? 왜 수염이 있어? 왜 이렇게 앉아? 고양이는 항상 제 조카의 곁에 있어주고 머리를 부벼줍니다. 깨물지도 않고 할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줍니다. 이럴 때 보면 고양이는 마치 철이 든 성인 같기도 합니다. 

 

고양이는 가리는 것도 없고 예민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처음 고양이 분양샵에서 고양이를 봤을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2개월짜리 아기 고양이들이 많았기 대문에 저는 한 마리씩 제 품에 안아봤습니다. 제 품에 제일 조용히 가만히 안겨있는 아이가 바로 이 고양이었습니다. 낯선 제게도 몸을 내어주며 쌔근쌔근 잠드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고 그 순간 저는 사랑이 마음에 가득차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동물을 한번도 길러본 적이 없는 저는 일주일 정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다시 오라는 분양샵 아저씨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갔지만 애가 탔습니다. 내 고양이를 누가 데려갈까봐서 겁이 났거든요. 제 마음에 사랑을 가득 심어준 아이는 3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사랑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고양이와 함께 지내는 일상들이 참 좋습니다. 그저 3키로밖에 되지 않는 작은 생명체가 제게 주는 행복은 너무 큽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고양이가 사랑받고 있으니 저도 참 행복합니다. 고양이가 죽기 전까지 사람을 계속 무서워하지 않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에게서 어떤 폭력도 받지 않은, 폭력을 경험해보지 못한 순수한 동물로 그렇게 살다가 갔으면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내 사랑스러운 4살 조카는 내 고양이를 좋아한다. 이모네 야옹이를 보고싶다고 계속 말한다.

 

조카는 2018년 1월생이고 내 고양이도 2018년 1월생이다. 같은 나이다.

조카는 고양이를 만지고 궁금해한다. 수염이 왜 있어? 왜 이렇게 걸어다녀? 꼬리가 왜 있어? 이빨이 어딨어? 입을 벌리라고 해봐. 뛰어올라갔어.

 

조카는 야옹이가 귀엽다고 하고 옆에서 계속 쳐다본다. 나처럼 고양이를 놓고 머리를 쓰다듬고 안아주는게 아니라 친구처럼 얼굴을 본다. 굳이 식빵자세의 고양이의 얼굴 앞에 자기의 얼굴을 갖다대고는 얼굴을 동등하게 놓고는 눈을 맞춘다.

난 고양이가 너한테 머리늘 부비는건 너를 좋아해서 그러는거야. 라고 해줬다. 왜냐면 야옹이는 말을 못하니까. 머리를 대고 좋아한다고 해주는거야.

 

조카는 또 고개를 숙이고 야옹이의 얼굴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맞추고는 묻는다. 야옹아. 나 좋아해?

 

조카한테 야옹이 털색깔이 뭐같애? 노란색 주황색이지?했다. 조카는 바지를 걷어올리고 다리를 보여주더니 음. 나는 주황색이야? 라고 한다.

나의 사랑하는 조카와 나의 사랑하는 야옹이.

내가 무엇인가를 이토록 사랑한다는 마음을 주는 두 존재.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다. 언제나.

 

예쁘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아직 천사같은 3살배기 아가들. 어디서 왔니. 너희들은. 선물같은 존재들이다. 어디서 와서 이렇게 이쁜거니.

 

고양이를 때리거나 죽인다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내가 고양이를 키워서 그런지 그런 뉴스를 보게 되면 화가 난다. 고양이는 그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되는 약한 동물이다.

 

고양이를 키워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가볍고 조그맣다. 안고 있을때는 작은 아기같고 누워서 자는 모습을 보면 천사같다. 고양이는 인간들이 구분 짓는 선과 악, 그 경계를 벗어나 있는 동물이다. 가치중립적으로 그냥 가만히 있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사는 연약한 동물일 뿐인데, 고양이보다 힘이 세다고 고양이한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고양이를 안고 있으면 느낄 수 있다. 고양이는 정말 작고 연약한 동물이라는 것을.

 

나는 고양이가 내게 오면 머리와 목, 등을 쓰다듬어 준다. 한 손안에 들어오는 머리와 목은 너무 연약해서 내가 손에 힘을 조금만 줘도 고양이는 쉽게 다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얌전히 쓰다듬어 준다. 고양이는 약한 동물이니, 약한 동물처럼 대해준다.

고양이가 가끔 발톱으로 할퀴거나 나를 물때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뭐 크게 다치는 거 아니니까 나는 그러려니한다. 대신 고양이의 발톱을 자주 잘라주고 고양이가 물 때는 이제 그만 만지라는 신호로 알고 손길을 거둘 뿐이다.

 

약한 자에게 약하게 대하고, 강한 자에게는 강하게 대하는 것은 인간 사이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해당되는 것 아닐까. 나보다 모든 점에서 연약한 동물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일은, 어떤 도덕이 필요하다.

 

오랜만에 대학교 동창을 만났다. 엄청나게 오랜만에 본 것인데 시간이 많이 흐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애들은 여전히 그애들 그대로 존재했고 시간만 흘렀을 뿐이었다.

 

우리는 몇년 만에 만나서 생각나는 것들을 얘기하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나의 고민에 친구는 "너는 능력이 있어서 다른 데 갈 수 있어도 워낙 잘하니까 더 있어도돼"라고 받아줬다. 그것은 내가 회사에서 받고 있는 대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회사 상사에게 받는 '마음에 들지 않음', 상사가 내게 쏟아내는 부정적 마음들, 모욕과 인격모독 같은 것들은 내 안에 깊은 분노가 자라게 했다. 나는 항상 '이 회사를 어떻게든 망하게 하리라'는 생각을 해왔다.

 

내 친구들은 회사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를 대우하는 것이 달랐다. 나는 강한 분노에 속해 있다가 친구들의 사랑안으로 넘어왔다. 우리들은 친구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서로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 진심이 담긴 눈과 말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나는 '이 순간은 아무도 내게서 빼앗지 못한다'는 생각을 깊게 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내가 느끼는 행복함은 오롯에 내것이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인간들은 회사에 몇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내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준다. 나는 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로우면서 노동을 파는 것보다 내 시간을 파는 것이 더 괴롭다고 느꼈다.

 

내가 고통스러운 시간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에 내 자유의지가 사라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부정적 감정에 있다는 것이 언제나 괴로웠다.

나는 '존재'냐 '소유'냐 딜레마에 한없이 빠져있다. 나는 늘 소유하기 위해 바쁘다고 생각했다. 어떤 소유들. 재산 뿐 아니라 학벌이라는 타이틀, 근사한 직업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근사한 물건 같은 실제적 소유를 한없이 추구했다. 내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있느냐, 내 이름으로 된 재산 같은 것들.

 

그러나 가끔은 소유보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순간에 느끼는 소중함과 기쁨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느냐와는 상관없이 내가 지금 느끼는 존재함인 것이다.

내가 나의 고양이에게서 느끼는 그것, 그것은 소유보다 존재였는데 이것은 고양이를 비롯해 내 친구들도 내게 선사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행복한 감정에 휩싸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존재들이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와서는 고양이와 함께 누워서 잠을 잤다. 친구들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리가 함께 보냈던 행복함을 다시 선사했고 고양이는 귀여운 존재 자체로 내 옆에 있어주면서 내게 행복함을 선사했다.

 

무언가를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보다는 가끔 그저 그냥 그렇게 행복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것도 나쁘지는 않다.

 

다섯살이 된 조카는 내 고양이를 너무 좋아한다. 하지만 자기 방식으로 좋아한다. 계속 만진다. 도망가도 쫓아가서 만진다. 구석으로 숨으면 그 구석으로 쫓아들어간다.

 

그리고 왜 자꾸 나를 피해? 라고 묻는다. 그럼 나는 조카의 머리와 얼굴을 막 만지고 배를 간지럽힌다. 누가 널 이렇게 계속 만져서 너가 싫어서 도망갔는데 쫓아다니면서 계속 만지면 넌 좋아? 고양이가 너 싫어할 것 같아.

 

조카는 입을 비쭉이며 나는 가만히 있을건데. 라고 한다. 아닌데. 너 저번에 이모한테 살려달라고 했는데. 난 약올리면서 웃는다. 깔깔깔.

똘똘한 아이는 고양이한테 미움을 받기는 싫은 모양이다. 이제 더 고양이를 만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양이를 안아준다. 그리고는 내가 안아주는데 왜 자꾸 움직여? 라고 묻는다.

 

그건 불편하니까. 너가 불편하게 안고있으니까. 너가 고양이 머리를 아래쪽으로 해서 자꾸 머리를 박으니까 고양이가 도망가지. 설명을 해준다.

 

아이는 깔깔 웃는다. 왜 그런건지 궁금한건 아닌 모양이다. 그냥 동물이 자신한테 안겨있다가 미끄러져 빠져 나가고 다시 잡으러 가고 다시 빠져 나가고. 이런 상황이 재밌는  모양이다. 그냥 계속 웃고 웃는다.

 

아니면 아직 작은 아이라 훨씬 작은 생명체를 만나보지 못해서 형아가 된 기분이 좋은가. 나도 뭔가 번쩍 번쩍 들 수 있다는데 기쁜걸까.

 

아이는 2018년 1월에 태어났고 고양이는 2018년 2월에 태어났다. 아이는 16키로이고 고양이는 4키로다. 나는 고양이를 4년째 키우고 있고 내 동생도 아이를 4년째 키우고 있다. 하지만 내 고양이는 이제 고작 10년정도 더 살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고양이를 자주 만나게 해 아이가 내 고양이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우리 10년 후에 고양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널 때 머리를 박고 같이울자. 이게 내 바람이자 큰그림이다.

 

그때까지 아이와 내가 고양이를 같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계속 함께 했으면 좋겠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있는 만큼 나중에 그만큼의 슬픔이 깊어질까봐 어쩐지 무섭다.

하지만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자라기만 아이의 시절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시절을 지나야만 비로소 성장을 할 수있고 인간이란 생명체가 돼 드디어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시기가 찾이오는 것처럼. 나의 훗날 어느 시기에도 내가 예상치 못한 슬픔이 있겠지만 또 기대치 못한 기쁨도 있을 것을 안다.

 

그저 자라고 무럭무럭 잘 크는것만 해도 되는 아이의 시절.

 

이 시절의 아이는 정말 타고난 그대로 지내고 있다. 그걸 보는게 난 즐겁다. 정말이지 인간이란 사실 원래 반짝반짝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 아이는 고양이의 자세를 한번 보고 너무 잘 따라한다. 한번 보고는 고양이 자세를 흉내낸다. 정말 타고난 재능이다. 이건 요가 자세, 스핑크스 자세인데. 배우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잘하는거니.

 

보라는 그렇게 환과 헤어졌다. 환은 보라에게 막 대했다. 보라는 그게 막대한 건지 환의 성격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환을 사랑하자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분이 나빠져서 성질을 내니 환은 연락을 끊어버렸다. 보라는 마음이 아팠다. 이정도밖에 안되는 쉬운 인연인가 했다. 환을 사랑하고자 했는데 환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한편으로 보라는 속이 시원했다. 그와 좋았던 기억이 없어서인지 그를 금방 잊었다. 사실 보라는 그를 사랑했다기보다 그가 그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한 셈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재력과 그의 사회적 위치였다. 그는 그녀에게 나중에 살림을 하지 않아도 되며 운전 같은 건 하지말고 택시를 타고 다니라고 했다. 그는 부자였다. 또 서울대 출신이었고 현재 유망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니 앞으로 성공은 따라오게 돼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가져다줄 아름다운 미래가 사라져서 보라는 슬펐을 뿐이다.

 

보라는 그녀에게 그 정도로 찬란하게 아름다운 미래를 가져다 줄리가 없겠지만, 성실하고 똑똑하고 다정한 현우를 만나보기로 했다. 마음이 따뜻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그는 성실했다. 현우는 큰 야망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 점이 보라에게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다. 가끔 우울한 것도 같았다. 다른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삶이 펼쳐진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건 안정감일수도 있다. 현우의 일상과 반복적인 루틴이 보라에게는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현우의 그러한 점이 삶에 안정적 기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라는 늘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극도로 불안정한것을 파악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더 불안정해 보이는 현태였다.

 

보라와 현태는 소설 얘기를 시작하는 사이로 친밀해졌다. 현태는 소설로 등단한적이 있는 작가였다. 한때는 소설을 열심히 썼으나 이제는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보라는 언젠가는 등단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할 뿐이었지만 현태는 그 꿈을 현실로 이뤄낸 사람이었기에 그가 멋있어 보였다.

 

둘은 소설과 소설가들에 대해 오래도록 얘기를 하다가 종종 자신이 꾼 꿈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꿈에서 세계의 종말을 겪었다든가 음악이나 단어의 상징이 나온다든가 하는 얘기였다. 보라는 소리가 시각화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보라의 꿈은 이렇다. 

나는 꿈에서 내 조카의 이름을 불렀으나 갑자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ㅇ과 ㅅ이 들어간 아름다운 글자였는데 혀를 아름답게 굴리면 나오는 부드러운 소리라는 것만 기억이 났다. 연성, 성연, 연수, 수영, 성우, 승우.. 어떤 글자의 조합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꿈이라는 무의식에서 깨어나 그 글자의 정체가 성연인 것을 떠올렸다. 무의식에서 나는 부드럽고 하얗고 푹신한 구름 사이로 떠돌아다니며 내 조카의 이름을 끝없이 조립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성연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성연은 내게 "이모, 하늘의 구름같이 폭신한 곳이야" 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급한 표현이라는 것을 나는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어도 그 무의식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찾기는 어려웠다.

 

현태는 보라의 이런 꿈 얘기를 주의깊게 들었다. 보라는 현태의 집중함과 사소한 관심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녀의 사소한 기억을 현태가 감싸안 듯이 보아주니 보라는 안정감과 깊은 애정을 느낀 것이다. 현태와 보라는 오래된 친구처럼 연인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사적이고 사소하고 쓸데없는 얘기를 오래 했다. 하지만 현태는 별안간 보라에게 등을 돌렸다.

 

현태는 데이트 전날 보라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무섭다고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현태는 보라를 이상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그는 그녀가 멘탈이 아주 바스라져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녀를 툭하고 아주 살짝만 건들여도 그녀가 사방으로 부서져 그 유리조각에 그의 발이 다쳐 피가 철철 흐를 것 같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보라가 그렇게 멘탈이 바스라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깊이 사랑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했는데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보라는 그를 곧 사랑하게 될 모양이었으며 그렇게 되면 보라는 그에게 집착하게 될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는 불행해질 것이었다.

 

보라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사실 보라는 그를 사랑할 것 같기는 했다. 그는 멀끔하고 키가 크고 똑똑하고 그녀의 말을 잘 들어줬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녀는 쉽게 사랑에 빠지니까. 아니, 그녀는 사랑에 빠질만한 구석을 너무 쉽게 발견하는 성격이니까. 그렇게 되면 그도 어쩌면 보라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을 테고, 아니 사실 그도 보라를 사랑할 준비를 마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성급히 보라를 밀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현태는 보라의 정서적 불안정함을 파악하자마자 그녀와의 만남의 싹을 잘랐다. 시작도 전에 싹을 아예 툭 잘라서 밟아버렸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