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혼자서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조직에 속해 있을 이유가 전혀 없으며 단어 그대로, 원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상대해야 할 일도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창작을 하고 책이 나오기까지 단 한 사람도 만나지 않고 작업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을 위해서 작업 공간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으며 자신의 작업 공간으로 다른 사람을 불러들여야 할 일도 없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혼자서 일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려왔다.

 

내면의 자유를 지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자유의 의미란 인간이 언어로써 자신과 세계를 가장 아름다우며 동시에 오류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혹은 그러한 글을 읽고 싶은 욕구와도 연관되는 것이다. 완벽한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편이지만, 혹은 존재한다 할지라도 천재가 아닌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가 닿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태초에 질문과 회의가 없었다면 진정 자유를 원하는 인간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할 것이다.

 

언어란 인간의 심상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만 의미가 있을 뿐일까, 아니면 사고와 의지는 결국 모두 언어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언어에 대한 이런 오래된 질문들을 떠올리게 된다.

 

정신적 자유란 이미 인간이 잘 알고 있는 관념의 경계 안에서 아무 구속 없이 자유롭게 뛰어 노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의 벽에 스스로 부딪치면서 유의미한 것들의 영역을 확장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내면의 세계를 넓히고 자신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일은 다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쾌락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이 추구하는 내면의 자유로움과 그것이 주는 은밀한 기쁨은 아주 쉽게 훼손되고 자주 모욕당한다. 예를 들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본격적인 사진집이 아닌 이상 삽화나 분위기 있는 사진과 화려한 색상이 가미된 글을 매우 싫어한다. 심지어는 책에 작가의 얼굴 사진이 반드시 등장하는 이상하고 유치한 관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일반 대중이 문학을 사랑하게 도와줄'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시각적 효과와 원고의 결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그런 것은 명목상의 취지부터 만들어지는 결과물까지 모두 다 거짓의 파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것들은 문학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인하는 것이며 그런 방법은 인간의 정신적 자유를 위해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거나 혹은 전혀 그런 자유를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문학에 동반되는 화제성 저널리즘이나 광고 문안들도 불필요하지 않나 생각하며 문학이 군중에게 더 친숙한 다른 장르와 잘 결합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럼으로써 계속해서 생존할 것이며 그 생존이 더욱 정당화될 수 있다는 타협적인 견해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문학의 행위는 자유롭고 창의적이다. 나는 자유와 창의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창의적일 수 없다면 어디에서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롭다면 그는 창의적인 인간일 것이다. 결국 자유란 기꺼이 선택된 정신적 투쟁에 의한 것이며, 문학은 내가 그것을 영혼을 바쳐 읽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는, 단지 흑과 백으로 표시된 기호의 한 페이지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오감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다른 분야와 달리 문학은 언어와 문자라는 약속된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비교할 수 없게 제한되며 동시에 한번 표현된 문장은 반대로 그 언어 안에서 쉽게 고정되어 버리는 불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문장은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에 잠겨야 하고, 그 무엇의 시민도 아니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엄격함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들은 그것을 행하는 인간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술의 행위는 창의적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 나에게는 특히 문자예술이 그렇다. 고뇌와 고통과 불행 등 모든 부정적인 조건을 불평 없이 껴안을 수는 있어도 정신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은 거부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지만 지금 문학이 군중에게 외면당하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중에게 추파를 보내거나 더 많은 다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더 많은 다수를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 이유나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리어 나는 근래 사람들이 근심하고 있는 문학의 미래에 대해서도 매우 낙관적인 편이다. 나는 문학은 영화와 달리 원래 다수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고 믿으며 문학이 군중에게서 멀어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자리를 올바로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니 한번도 군중에게 진정으로 친밀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므로 비로소 정직하게 말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양적 의미로만 존중받는 시장에서 소외되거나 구석자리에서 푸대접받는 것은 결코 불평할 일이 아니다.

 

시장은 원래 팝(Pop)적인 글을 사랑하게 되어있다. 내 의견으로는 글을 쓰기로 스스로 결정한 사람이 그런 점을 불평한다면 그는 문학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뭔가 근본적으로 확실히 다른 것에 봉사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소수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는 것이 반드시 자만심이나 우월감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한다는 것이 우쭐한 기쁨을 주는 것도 아니다.(경제적인 혜택을 동반하지 않는 우월감은 더욱이 이 세기에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단지 인간에게는 소수의 영역에 해당하는, 그러나 대치될 수 없는 욕구들이 언제나 존재하며,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작업이 언제나 어디에선가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문학의 행위는 윤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장을 선택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문장을 찾아가는 작업은 최선의 정직을 찾아가는 것이고 언제나 깊은 회의 속에서 방황하고 생각에 잠겨있되 결코 냉정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 이후에도 '나는 그것에 대하여 진정 정직했는가?' 하는 질문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문학은 세계의 대한 하나의 태도이다. 그것은 빈약하게 말해지거나 과도하게 말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며 침묵해야 할 것을 말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경멸한다. 또한 정직이란 것은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만일 그가 단지 알지 못해서 최선의 것을 말하지 못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로 정직하지 못함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문장을 선택하는 행위는 선택 이전이나 마찬가지로 선택 이후에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비판하게 만든다. 문장에 있어서 최선의 정직이라고 하는 것은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누구도 그것을 모른다고 하는 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더 확장해서 문학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가 쓰고 읽는 대상에 대해서 변함없이 어느 정도는 비판적이고 회의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그래야만 할 것이다. 세계의 사물에 대해서,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이 정직하고자 하는 과정은 외재하는 어떤 가치에 자연스럽게 헌신하게 되는 일과도 같다. 'K가 도착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마을은 깊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로 한 권의 책이 시작된다. 이토록 담담하고 태연한 어조로, 평범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시작되는 자신만만한 도입부처럼 언어나 문장에서 정직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에 대한 관용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차가운 용기를 획득하여 그것을 주저 없이 발휘하는 과정 자체가 곧 지극한 선(善)이 되며, 자신을 포함한 세상에 헌신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고통이나 개별의 마음에도 진지하게 반응하리라는 신념을 나는 가지고 있다.

 

문학이 단지 지껄임이나 도취적인 독백, 정화되지 않은 내면의 무분별한 토로, 충분히 자신 안에서 비판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피상적인 이미지들의 나열이나 엄격한 정신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닌 차용된 듯한 단어와 수사로 치장한 가장행렬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그런 윤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