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그와 아주 짧게 사귀었는데 그 기간에 미래를 너무 많이 그렸다. 나는 그와 결혼할 생각도 했고 그 뒤에는 진로를 어떻게 바꿀지까지 생각했다. 나는 아마도 혹시 전업주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까지 한 것이다.

 

나는 미래를 그려나갔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니 나는 그를 잃었고 그리고 내가 그렸던 모든 미래까지 전부 다 잃었다. 그건 언제나 내가 즐겨하던 상상이었는데 그 상상이 그를 통해 정말로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그를 알면 알아갈수록 그가 매우 스마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랑은 다른 리그에 놓여진 사람이었다. 그와 나의 생산성(업무강도)은 10배 이상 차이가 났고, 연봉은 5배 이상 차이났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매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니 아주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금융업계를 공부한 뒤 그것을 기사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했는데 이 과정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실제로 돈이 움직이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유망한 기업을 발굴한 뒤 투자심의서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 그 회사의 투자를 받아내는 일을 했다. 그건 정말로 일이었다. 정말로 돈을 벌수도 있고 안 벌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 일들을 놓고 훈수를 두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그들이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를 생각해서 글을 썼다. 내 일은 너무 쉬워보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는 덜 거친 직업을 가진 셈이기도 했다.

 

나는 종종 그를 보면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열등감이 매우 컸는데, 내가 늘 느끼는 것은 같은 학교 안에 있어도 우리들의 리그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입학할 때 문을 닫고 들어왔고, 나는 여기에 속하는 능력자는 아니었다.

 

그는 능력자였다. 나는 그래서 좋았다. 나랑 다르고 나보다 나아서.

 

그래서 그를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불안했다. 나를 왜? 내가 어디가 좋아서? 사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가득했는데, 이것은 그의 문제기도 했고 내 문제기도 했다. 그는 정말로 나를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으니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이고, 또 나는 스스로를 사랑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탓이 컸다.

 

그는 어쨌거나 나의 옆에 있기는 했지만 나에게 반한 상태는 아니었다. 뭐 그랬던 것이다. 그는 내게 반하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들여 나를 그에게 보여줌으로써 그가 나에게 스며들도록 해야했다. 내가 구애자가 돼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내게 애정을 주었다. 깊은 사랑은 아니었으나 애정이었다. 그것은 애정이었으나, 나를 향한 특별한 애정이라기보다는 그는 원래 애정을 갖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모든 사람들, 특히 후배들에게 친절했는데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능력을 후배들에게 쓴 다음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의 그늘 아래 애정을 받아먹었다.

 

그것은 여자로서 내가 매력이 있기 보다는,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자식같았다. 불쌍한 아이에게 드는 측은함에서 비롯된 마음일까. 그는 내게 손이 많이 가고, 자식 같고, 안쓰럽다고 말했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보고서를 보내주고, 사람을 소개해줬다.

 

그것은 어떤 애정인가, 인간이 지닌 측은지심인가. 나는 그가 품은 사랑이 뭔지 그것을 골똘히 생각했다. 그것을 분석하고 생각하고 파헤치고, 그것의 허점을 찾아냈다. 그것은 허점투성이였는데, 내가 하는 짓은 그저 바보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긍정적 사이드를 보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었는데.

나는 그를 좋아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만지고 귀를 만지고 머리칼을 쓸어 넘겼고, 그의 입에 뽀뽀했다. 나는 그가 매우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귀여웠다. 나는 어떤 사랑하는 마음이 안에서 솟아났다. 나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귀를 만졌다.

 

내 안에는 사랑이 이다지도 많았나. 어쩌면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경배하고 찬양할, 그러니까 신으로부터의 탄생된 인간은 그런 사랑이 심어져있는데 그것은 평소엔 자취를 감추다가 이렇게 등장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어떠한 사랑 안에서 그를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는 내게 나를 왜 이렇게 좋아하냐, 고 말했지만 그건 나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미술가가 자신의 뮤즈를 오래도록 감탄하며 쳐다보던 그 순간처럼 그를 계속 오래 쳐다봤다. 그는 내 시선에 부담을 느끼면서 밖의 풍경을 봐, 나를 보지 마, 여기 데려왔는데 왜 나만 봐, 라고 말했으나 나는 당신이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라고 생각하고 그 말은 삼켰다. 그 말은 어쩌면 너무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

 

나는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랑과 그리고 내가 받고 싶은 모든 사랑을 담아서 그를 좋아했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해. 사랑해.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더욱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조금 더 신뢰가 쌓이고 영글어지면 내뱉어야 할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은 안에 남겨둔채, 그냥 오빠, 라고 부를 뿐이었다.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다. 나는 감정이 풍부하고 아주 오래토록 사랑을 생각하고, 아주 오래 그 감정에 빠져있다. 그리고는 그것의 허점을 찾아내 혼자 불안해하고 괴로워한다. 그것이 내 큰 약점이었다. 대체 왜 그런걸까. 이것은 정신병인가.

 

그는 내게 충실하게 연락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금융인답게 온갖 투자자들과 금융인들을 만나러 다녔고 골프를 쳤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돈과 정보가 오갔고, 나는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있는 그가 멋있어보였다. 나도 그 자리에 껴서 옆에 앉아 그 정보들을 다 흡수한 뒤 아주 근사한 기사를 한편 써내고 싶었다.

 

여러모로 그러니까 그는 아주 완벽하게 멋있었다. 조금 아저씨스럽기는 했고 우리에게는 로맨틱함은 좀 덜했고 순수한 어떤 감정들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좋았다. 그의 사랑은 힘이 있었다. 그는 돈과 인맥과 정보들을 넘치게 갖고 있어서, 그는 사랑을 하기만 하면 줄 수 있는게 많았다.

 

나는 늘 그것이 없었다. 사랑의 힘 말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줄 게 없는 사람은 너무 슬픈 법이다. 아무리 사랑하지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줄만큼 사랑하지만, 가진 게 없으면 줄 것이 없다. 그 슬픔 속에서 그는 이다지도 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난 인생의 절반을 벌써 살았어"라고 말했다. 중년의 남자는 그런건가. 나는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벙쪄 그럴 쳐다봤고 그는 내게 "너는 산술적으로 늙어갈 것이고, 나는 기하급수적으로 늙어가겠지"라고 말했다. 그는 중년의 남자였으니까.

 

난 아직도 20대에 머물고 싶은, 30대 초반인데, 그는 중년이었고, 나는 어떤 이상한 여자가 된 것만 같았다. 내가 늘 가십거리처럼 얘기하던 "돈 많은 중년 남자가 10살이나 어린 여자를 델고 산대"라고 말한 가십거리의 주인공이 내가 된 것만 같아서 그 것이 너무 이상했다.

 

그런데 그런 가십거리의 주인공은 늙어버린 부자의 중년남자와 아주 예쁜 젊은 여자의 만남이지 않던가. 그렇지만 그는 돈은 잘 벌어도 재산은 없고 나는 그보다는 어려도 예쁘지는 않았다. 나는 사실 예쁘지도 않고 살만 잔뜩 찐 그냥 찌들어있는 인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이상한 클리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그도 그런 남자의 상징이 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그는 그냥 아이였다. 일에 지쳐있는 아이였는데 내게 안겨있는 것을 좋아하는 지친 영혼이었다.

 

아, 그러니까 이 연애는 이렇게 짧게 끝이났다. 그랬다. 그냥. 그런것이었다. 나는 우울하다. 몹시 우울하고 짜증이 나고 매우 빡쳐있다. 나는 소리를 지르거나 어디론가 마구 뛰어다니고 싶다.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싶다. 화가 난다. 난 그를 좋아했는데 왜 이렇게 됐지.

 

나는 내 안에 넘치는 사랑을 쏟을 대상이 필요하고, 그리고 내 안에 싹트고 있는 불안을 잠재울 필요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다 나를 망친다.

 

오랜만에 대학교 동창을 만났다. 엄청나게 오랜만에 본 것인데 시간이 많이 흐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애들은 여전히 그애들 그대로 존재했고 시간만 흘렀을 뿐이었다.

 

우리는 몇년 만에 만나서 생각나는 것들을 얘기하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나의 고민에 친구는 "너는 능력이 있어서 다른 데 갈 수 있어도 워낙 잘하니까 더 있어도돼"라고 받아줬다. 그것은 내가 회사에서 받고 있는 대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회사 상사에게 받는 '마음에 들지 않음', 상사가 내게 쏟아내는 부정적 마음들, 모욕과 인격모독 같은 것들은 내 안에 깊은 분노가 자라게 했다. 나는 항상 '이 회사를 어떻게든 망하게 하리라'는 생각을 해왔다.

 

내 친구들은 회사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를 대우하는 것이 달랐다. 나는 강한 분노에 속해 있다가 친구들의 사랑안으로 넘어왔다. 우리들은 친구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서로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 진심이 담긴 눈과 말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나는 '이 순간은 아무도 내게서 빼앗지 못한다'는 생각을 깊게 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내가 느끼는 행복함은 오롯에 내것이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인간들은 회사에 몇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내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준다. 나는 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로우면서 노동을 파는 것보다 내 시간을 파는 것이 더 괴롭다고 느꼈다.

 

내가 고통스러운 시간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에 내 자유의지가 사라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부정적 감정에 있다는 것이 언제나 괴로웠다.

나는 '존재'냐 '소유'냐 딜레마에 한없이 빠져있다. 나는 늘 소유하기 위해 바쁘다고 생각했다. 어떤 소유들. 재산 뿐 아니라 학벌이라는 타이틀, 근사한 직업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근사한 물건 같은 실제적 소유를 한없이 추구했다. 내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있느냐, 내 이름으로 된 재산 같은 것들.

 

그러나 가끔은 소유보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 순간에 느끼는 소중함과 기쁨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느냐와는 상관없이 내가 지금 느끼는 존재함인 것이다.

내가 나의 고양이에게서 느끼는 그것, 그것은 소유보다 존재였는데 이것은 고양이를 비롯해 내 친구들도 내게 선사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행복한 감정에 휩싸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존재들이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와서는 고양이와 함께 누워서 잠을 잤다. 친구들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리가 함께 보냈던 행복함을 다시 선사했고 고양이는 귀여운 존재 자체로 내 옆에 있어주면서 내게 행복함을 선사했다.

 

무언가를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보다는 가끔 그저 그냥 그렇게 행복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것도 나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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