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헌책방을 해야지'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간판 이름으로 써놓은 지 오래이다
발에 걸리는 돌들 가운데
눈에 걸리는 돌들 제법
모아둔 지 오래이다
돌로 문지방을 쌓을 요량이다
문턱 앞에서 숨 한번 고르시라고
돌에게 의지해온 지 오래이다
김사인 선생님이 집어다준 돌도 있고
윤제림 선생님한테 뺏어온 돌도 있다
책도 골라놓은 지 오래이다
버릴 책은 애초에 버려질 책
버렸다가 다시 들고 온 책은
어떻게 해서도 버려지지 않을 책
(당신은 어떤 책을 원하십니까)
책장도 디자인해놓은 지 오래이다
아직 수종을 고르지는 않았으나
상상하자면 달팽이관을 닮은 미끄럼틀 형세다
미끄러지자 책과 책 사이에서 미끄러져보자
근데 나 언제부터가 어른일까
그때가 이때다 불어주는 호루라기
그런 거 어디 없나 그런 게 어디 있어야
돌도 놓고 돈도 놓고 마음도 놓는데
매일같이 놓는 건 체중계 위에 내 살 가마니라니
국회의원만 봐도 제가 어른이다 싶으니까
나밖에 없습니다 나 같은 어른 어디 없습니다
새벽같이 띠 두르고 나와 명함 돌려가며 뽑아줍쇼
입술에 침 발라가며 부처웃음 만개인 걸 텐데
(당신은 어떤 정치인을 뽑아왔던 겁니까)
샘플로 견적내볼 어른 왜 없을까 국회방송 좀 보자니
어른은 어렵고 어른은 어지럽고 어른은 어수선해서
어른은 아무나 하나 그래 아무나 하는구나 씨발
꿈도 희망도 좆도 어지간히 헷갈리게 만드는데
TV조선 앵커는 볼 때마다 왜 저렇게 조증일까
목 졸린 돼지처럼 왜 늘 멱따는 소리일까
넥타이가 짧은가 목이 두껍나 뭐가 좀 불편하면
넥타이를 풀든가 목살을 빼든가 뭘 좀 하든가 하지
아 답답해 아 시끄러 아 짜증나 아 언니
텔레비전 좀 끄라니까 정신 사나워 죽겠잖아
조카 젖 먹이고 트림 기다리느라 애를 어르는
동생의 팔놀림은 내게 처음 해 보이는 포즈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절로 되는 아기 바구니
엄마가 되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엄마만 되면 헌책방을 해도 될까나
하루 지나 매일 하루씩
가게 오픈 왜 미루느냐는 물음에 답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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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사라는 뉴스레터에서 소설가 장강명이 추천해준 시다.
장강명의 코멘트다.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장강명입니다.
그러게요. TV조선 앵커는 왜 저렇게 목소리 톤이 높을까요. 조선중앙TV에 기백으로 눌려서는 안 된다고 다짐이라도 하는 걸까요. 전하는 내용도 대개 그렇습니다. 듣다보면 아 답답해 아 시끄러워 아 짜증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래요, 그런 것 같아요. 아무나 해요 어른. 스물여섯 살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어른 됨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느꼈습니다. 삶의 불확실성을 껴안는 것. 태연한 표정으로, 깜깜한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
그런데 그런 얘기 요즘은 잘 안 하죠. 저는 저대로 깨달음의 감흥이 희미해졌고, 세상은 세상대로 어른 됨의 의미를 깊이 알고 싶어하지 않고, 어렵고 어지럽고 어수선해서 피로감이 듭니다. 제 나이도 애매합니다. 어른 됨을 말하는 사십대는 철이 덜 들었든지 꼰대든지 둘 중 하나 아닐까요(김민정 시인은 사십대가 되기 전에 이 시를 쓰셨습니다).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에 실린 시들을 좋아합니다. 시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단어가 툭툭 튀어나와 슬며시 웃음이 나고, 직진하는 화법이 후련합니다. 삶과 세상이 단정해지면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어떤 일인가요? 저는 헌책방을 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운영하는 헌책방을 찾아가보고 싶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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