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한테 많이 차여본 사람인데 이 경험은 내게 매우 익숙하다. 맨 처음 차였을 때는 언제였나

대학교 입학 후 어떤 오빠를 좋아했다. 멀끔하고 키가 컸다. 눈이 살짝 쳐져서 인상이 선했다. 목소리는 매우 낮았고 과묵했다. 그래서 좋았다.

 

그 오빠한테 거의 매일 연락을 했고 자주 밥을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한테 딱 선을 그었는데 그때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아주 몇가지 사소한 경험들을 가지고서는 그것은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기타연주를 해준 것, 밥과 음료를 사준 것 등이 있었다.

 

그 당시 내게는 친했던 남사친이 있었는데 나를 아주 안쓰럽게 생각했다. 남사친은 내게 커피를 한잔 사주고서는 "내가 너한테 커피를 사주는 이유가 뭔지 알아?"라고 물었다.

 

 "그냥. 불쌍해서인가."라고 대답했고 그는 "그 이유랑 같다구. 그 오빠가 너한테 커피를 사줬던거랑 내가 사주는거랑. 의미부여 하지마."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사친의 조언을 듣고서 나는 그를 신뢰하게됐다.  남사친의 조언에 따라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서 벗어나 해방되기 위해서  어느날을 딱 정해서 그날 고백을 했다. 그리고 차였다.

 

그것이 첫번째 차인 경험이었다.

 

내 남사친은 내 첫번째 차인 경험부터 그 이후에 무수히 많았던 연애의 흑역사를 죄다 알고 있다. 내게는 일기장같은 존재다. 그에게 내 얘기를 하면서 그라는 인간에 내 기록을 적어내려가는 느낌이랄까.

고백을 했다가 차였을 때 드는 느낌은 어떠한가 하면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차이게 되면서 이제 내게는 공식적으로 좋아하는 인간이 없게 된다.

 

어떤 곳을 가거나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사람과 함께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이제는 안하게 된다. 그리고 연락을 보내놓고 여러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면서 기다림의 시간도 갖지 않게 된다. 정말 매우 자유로워지는거다. 

 

그리고 내 감정의 결론은 그 인간에게 쥐어져 있으니. 이 또한 자유롭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모든 것을 다했으니 "이제 공은 당신에게." 이런 느낌처럼. 

 

마치 회사를 다닐때 골치 아픈일이 생기면 바로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누군가 지적을 하면, 나는 상사의 결재를 받았으니 자유로운 것과 같다. 이 문제는 승인해준 상사 당신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혼나기는 하지만 나는  일에 보고를 했으니까 자유롭다. 내가 순간 순간 드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사실 자유로워지기 위한 방법이다. 어쩌면 매우 비겁한 방식이기도 하다.

 

혼자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그와 아주 짧게 사귀었는데 그 기간에 미래를 너무 많이 그렸다. 나는 그와 결혼할 생각도 했고 그 뒤에는 진로를 어떻게 바꿀지까지 생각했다. 나는 아마도 혹시 전업주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까지 한 것이다.

 

나는 미래를 그려나갔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니 나는 그를 잃었고 그리고 내가 그렸던 모든 미래까지 전부 다 잃었다. 그건 언제나 내가 즐겨하던 상상이었는데 그 상상이 그를 통해 정말로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그를 알면 알아갈수록 그가 매우 스마트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랑은 다른 리그에 놓여진 사람이었다. 그와 나의 생산성(업무강도)은 10배 이상 차이가 났고, 연봉은 5배 이상 차이났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매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니 아주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금융업계를 공부한 뒤 그것을 기사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했는데 이 과정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실제로 돈이 움직이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유망한 기업을 발굴한 뒤 투자심의서를 쓰고 사람들을 만나 그 회사의 투자를 받아내는 일을 했다. 그건 정말로 일이었다. 정말로 돈을 벌수도 있고 안 벌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 일들을 놓고 훈수를 두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그들이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를 생각해서 글을 썼다. 내 일은 너무 쉬워보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는 덜 거친 직업을 가진 셈이기도 했다.

 

나는 종종 그를 보면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열등감이 매우 컸는데, 내가 늘 느끼는 것은 같은 학교 안에 있어도 우리들의 리그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입학할 때 문을 닫고 들어왔고, 나는 여기에 속하는 능력자는 아니었다.

 

그는 능력자였다. 나는 그래서 좋았다. 나랑 다르고 나보다 나아서.

 

그래서 그를 좋아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불안했다. 나를 왜? 내가 어디가 좋아서? 사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가득했는데, 이것은 그의 문제기도 했고 내 문제기도 했다. 그는 정말로 나를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으니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이고, 또 나는 스스로를 사랑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탓이 컸다.

 

그는 어쨌거나 나의 옆에 있기는 했지만 나에게 반한 상태는 아니었다. 뭐 그랬던 것이다. 그는 내게 반하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들여 나를 그에게 보여줌으로써 그가 나에게 스며들도록 해야했다. 내가 구애자가 돼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내게 애정을 주었다. 깊은 사랑은 아니었으나 애정이었다. 그것은 애정이었으나, 나를 향한 특별한 애정이라기보다는 그는 원래 애정을 갖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모든 사람들, 특히 후배들에게 친절했는데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능력을 후배들에게 쓴 다음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의 그늘 아래 애정을 받아먹었다.

 

그것은 여자로서 내가 매력이 있기 보다는,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자식같았다. 불쌍한 아이에게 드는 측은함에서 비롯된 마음일까. 그는 내게 손이 많이 가고, 자식 같고, 안쓰럽다고 말했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보고서를 보내주고, 사람을 소개해줬다.

 

그것은 어떤 애정인가, 인간이 지닌 측은지심인가. 나는 그가 품은 사랑이 뭔지 그것을 골똘히 생각했다. 그것을 분석하고 생각하고 파헤치고, 그것의 허점을 찾아냈다. 그것은 허점투성이였는데, 내가 하는 짓은 그저 바보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긍정적 사이드를 보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었는데.

나는 그를 좋아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만지고 귀를 만지고 머리칼을 쓸어 넘겼고, 그의 입에 뽀뽀했다. 나는 그가 매우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귀여웠다. 나는 어떤 사랑하는 마음이 안에서 솟아났다. 나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귀를 만졌다.

 

내 안에는 사랑이 이다지도 많았나. 어쩌면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경배하고 찬양할, 그러니까 신으로부터의 탄생된 인간은 그런 사랑이 심어져있는데 그것은 평소엔 자취를 감추다가 이렇게 등장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어떠한 사랑 안에서 그를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는 내게 나를 왜 이렇게 좋아하냐, 고 말했지만 그건 나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미술가가 자신의 뮤즈를 오래도록 감탄하며 쳐다보던 그 순간처럼 그를 계속 오래 쳐다봤다. 그는 내 시선에 부담을 느끼면서 밖의 풍경을 봐, 나를 보지 마, 여기 데려왔는데 왜 나만 봐, 라고 말했으나 나는 당신이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라고 생각하고 그 말은 삼켰다. 그 말은 어쩌면 너무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

 

나는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랑과 그리고 내가 받고 싶은 모든 사랑을 담아서 그를 좋아했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해. 사랑해.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우리가 더욱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조금 더 신뢰가 쌓이고 영글어지면 내뱉어야 할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은 안에 남겨둔채, 그냥 오빠, 라고 부를 뿐이었다.

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다. 나는 감정이 풍부하고 아주 오래토록 사랑을 생각하고, 아주 오래 그 감정에 빠져있다. 그리고는 그것의 허점을 찾아내 혼자 불안해하고 괴로워한다. 그것이 내 큰 약점이었다. 대체 왜 그런걸까. 이것은 정신병인가.

 

그는 내게 충실하게 연락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금융인답게 온갖 투자자들과 금융인들을 만나러 다녔고 골프를 쳤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돈과 정보가 오갔고, 나는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있는 그가 멋있어보였다. 나도 그 자리에 껴서 옆에 앉아 그 정보들을 다 흡수한 뒤 아주 근사한 기사를 한편 써내고 싶었다.

 

여러모로 그러니까 그는 아주 완벽하게 멋있었다. 조금 아저씨스럽기는 했고 우리에게는 로맨틱함은 좀 덜했고 순수한 어떤 감정들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좋았다. 그의 사랑은 힘이 있었다. 그는 돈과 인맥과 정보들을 넘치게 갖고 있어서, 그는 사랑을 하기만 하면 줄 수 있는게 많았다.

 

나는 늘 그것이 없었다. 사랑의 힘 말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줄 게 없는 사람은 너무 슬픈 법이다. 아무리 사랑하지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줄만큼 사랑하지만, 가진 게 없으면 줄 것이 없다. 그 슬픔 속에서 그는 이다지도 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난 인생의 절반을 벌써 살았어"라고 말했다. 중년의 남자는 그런건가. 나는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벙쪄 그럴 쳐다봤고 그는 내게 "너는 산술적으로 늙어갈 것이고, 나는 기하급수적으로 늙어가겠지"라고 말했다. 그는 중년의 남자였으니까.

 

난 아직도 20대에 머물고 싶은, 30대 초반인데, 그는 중년이었고, 나는 어떤 이상한 여자가 된 것만 같았다. 내가 늘 가십거리처럼 얘기하던 "돈 많은 중년 남자가 10살이나 어린 여자를 델고 산대"라고 말한 가십거리의 주인공이 내가 된 것만 같아서 그 것이 너무 이상했다.

 

그런데 그런 가십거리의 주인공은 늙어버린 부자의 중년남자와 아주 예쁜 젊은 여자의 만남이지 않던가. 그렇지만 그는 돈은 잘 벌어도 재산은 없고 나는 그보다는 어려도 예쁘지는 않았다. 나는 사실 예쁘지도 않고 살만 잔뜩 찐 그냥 찌들어있는 인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이상한 클리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그도 그런 남자의 상징이 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그는 그냥 아이였다. 일에 지쳐있는 아이였는데 내게 안겨있는 것을 좋아하는 지친 영혼이었다.

 

아, 그러니까 이 연애는 이렇게 짧게 끝이났다. 그랬다. 그냥. 그런것이었다. 나는 우울하다. 몹시 우울하고 짜증이 나고 매우 빡쳐있다. 나는 소리를 지르거나 어디론가 마구 뛰어다니고 싶다.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싶다. 화가 난다. 난 그를 좋아했는데 왜 이렇게 됐지.

 

나는 내 안에 넘치는 사랑을 쏟을 대상이 필요하고, 그리고 내 안에 싹트고 있는 불안을 잠재울 필요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다 나를 망친다.

 

아침에 추워서 편의점에서 핫팩을 샀다. 그가 내게 집이 춥냐면서 불쌍하다고 침낭을 하나 주고 핫팩도 잔뜩 사다주겠다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나서 울컥했다. 그는 나를 안쓰럽게 보고 불쌍하게 여겼으며 자신이 도와줄 것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말에 담긴 애정이 그리웠던 건지, 핫팩을 들고 지하철로 출근을 하는 내내 우울함이 밀려들었다. 이런 따뜻한 애정의 순간이 더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느끼는 우울함과 슬픔도 깊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짧은 기간을 사귄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화가 나는 것은, 생각이 들수록 그가 생각보다 더욱 괜찮은 사람이라는 점에 있다. 내가 이만한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하게도 딱 마주치게 되는데 어떻게 우리가 만나게 됐을까, 싶은 것이다.

나는 그와 내가 아주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정말 비슷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가 나를 향해 가졌던 생각과 마음이 그저 순수하게 애정과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내 자신이 싫어진다.

나는 바보같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랑인가,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에는 얼마나 큰 힘이 있는가를 항상 따져봤다. 그런데 모든 것이 끝난 뒤 그것이 그저 순수하게 애정과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내 자신이 매우 싫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원망하는 것에 더해 슬픔이 마음 안쪽으로부터 차오른다.

슬픔은 마음 안쪽으로부터 차올라, 태초에 바다가 생겨나듯이, 물이 고이고 고여 깊어지고 깊어져 거대한 바다를 만들어 수면이 찰랑대는 것처럼, 내 슬픔도 차오르고 차올라 그것이 눈물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관찰하다가 점심시간에 밥을 안먹고 눈물을 흘렸다. 내 눈물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다. 눈물로 감정이 표현되는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는 얼마간 울다가, 흘린 눈물만큼의 슬픔이 내 마음에서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진정이 됐다. 하지만 나는 비참하게 구걸을 하고 싶어졌다. 마치 나를 비추는 사랑은 그 혼자 소유하고 있는 냥, 난 그에게 다가가서는 다시 그 빛을 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다시 한번만 생각을 바꿔줘 제발.

이것은 어찌보면 사랑놀이를 한바탕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엇을 그토록 대단한 그 무엇을 했다고. 나는 사랑의 기간보다 더 오랜 기간을 슬픔에 빠져있는가 말이다.

난 다시 한번 카톡에 들어가 사진으로 그의 얼굴을 본 뒤 그가 여전히 귀엽다고 느꼈다. 예전에는 이 얼굴을 내가 만지고 뽀뽀하면서 귀여워했었는데 이제는 없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더 우울해졌다. 그런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시절의 감정을 느꼈던 날들도 그리운 날도 오겠지.

 

보라는 때때로 현성을 생각했다. 아무런 서사도 아무런 정보도 없는 만남이었다. 그런데도 현성과의 짧은 만남이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보라와 현성은 서로 누구인지도 모른채 통화를 했다. 술에 취한 보라는 혀가 꼬부라져서는 엉엉 울다가 웃다가 애교를 부렸다. 그게 귀여워서인지 현성은 보라를 만나고 싶다고 졸라댔다. 현성은 추론에 추론을 더해 보라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둘은 만났다.

 

보라는 아무말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현성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보라는 현성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너는? " "하지만 나는 보라가 누구인지 모르는걸" "그렇지만 보라는 현성이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현성이는 아니야? 그런거야? 얼른 좋아한다고 말해. 얼른! " "그래 보라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런데 제일 좋다면서 왜 얼굴을 안보여주니." 따뜻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보라는 집이 어딘지 말을 안해줄 수가 없었다.

 

"현성이는 보라한테 뭐 해줄건데?"

"뭐를 해줄까. 뭐 해줬으면 좋겠어?"

"음 안아줄래?"

"그래 내가 안아줄게."

"안아만 줘야 돼 알았지?"

"그럴게."

 

보라는 안아만 준다는 현성의 말이 개수작이나 느끼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그저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일면식도 모르는 남자지만 보라를 안아만 줄 것 같았고 그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현성이를 만나게 됐다. 보라는 현성을 발견하자마자 현성이에게 가서 안겼다. 길을 잃고 헤매던 새끼 양이 엄마 품에 돌아와 안기듯이. 그렇게 와락.

 

키가 큰 현성의 어깨는 보라의 머리 위를 훌쩍 넘었다. 단단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고 보라의 어깨를 감싸 안는 현성의 팔이 따뜻했다. 현성은 보라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품에서 떼 보라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보라는 내가 현성의 마음에 들었을지, 두근대며 기다렸다. 현성은 다시 보라를 안았다. 그녀는 조바심이 났다. 그의 마음에 들었을까. 통과인가. 아닌가.

 

보라는 현성의 허리를 잡고 얼굴을 가슴에 묻고 한참을 서 있었다. 자신이 사는 집 근처 골목에서. 어두운 골목에서. 그녀는 이곳을 앞으로도 수 십번, 수 백번을 지나다닐 것이고 그때마다 가끔 현성과 자신을 생각하게 될 것이었다. 그 장면은 어떻게 기억될까. 한 때 외로움에 미쳐 행했던 어리석은 행동으로 기억될까. 성욕을 쫓아 온 어떤 남자의 실패담으로 기억될까. 아니면 그저 아름답게 포장한 사랑스러운 포옹으로 기억될까.

 

아무려면 어때. 보라는 이 순간이 지속하길 바랐다. 현성은 보라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우리 이틀 뒤 이곳에서 오후 3시에 보자”고 약속을 했다. 그렇게 둘은 십여분을 더 안고 있었다. 그리고 현성은 손을 흔들며 사라졌고 보라는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고 때때로 보라는 그곳을 지나며 현성을 생각한다.

 

 

보라는 그렇게 환과 헤어졌다. 환은 보라에게 막 대했다. 보라는 그게 막대한 건지 환의 성격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환을 사랑하자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분이 나빠져서 성질을 내니 환은 연락을 끊어버렸다. 보라는 마음이 아팠다. 이정도밖에 안되는 쉬운 인연인가 했다. 환을 사랑하고자 했는데 환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한편으로 보라는 속이 시원했다. 그와 좋았던 기억이 없어서인지 그를 금방 잊었다. 사실 보라는 그를 사랑했다기보다 그가 그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한 셈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재력과 그의 사회적 위치였다. 그는 그녀에게 나중에 살림을 하지 않아도 되며 운전 같은 건 하지말고 택시를 타고 다니라고 했다. 그는 부자였다. 또 서울대 출신이었고 현재 유망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니 앞으로 성공은 따라오게 돼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가져다줄 아름다운 미래가 사라져서 보라는 슬펐을 뿐이다.

 

보라는 그녀에게 그 정도로 찬란하게 아름다운 미래를 가져다 줄리가 없겠지만, 성실하고 똑똑하고 다정한 현우를 만나보기로 했다. 마음이 따뜻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그는 성실했다. 현우는 큰 야망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 점이 보라에게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다. 가끔 우울한 것도 같았다. 다른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삶이 펼쳐진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건 안정감일수도 있다. 현우의 일상과 반복적인 루틴이 보라에게는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현우의 그러한 점이 삶에 안정적 기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라는 늘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극도로 불안정한것을 파악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더 불안정해 보이는 현태였다.

 

보라와 현태는 소설 얘기를 시작하는 사이로 친밀해졌다. 현태는 소설로 등단한적이 있는 작가였다. 한때는 소설을 열심히 썼으나 이제는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보라는 언젠가는 등단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할 뿐이었지만 현태는 그 꿈을 현실로 이뤄낸 사람이었기에 그가 멋있어 보였다.

 

둘은 소설과 소설가들에 대해 오래도록 얘기를 하다가 종종 자신이 꾼 꿈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꿈에서 세계의 종말을 겪었다든가 음악이나 단어의 상징이 나온다든가 하는 얘기였다. 보라는 소리가 시각화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보라의 꿈은 이렇다. 

나는 꿈에서 내 조카의 이름을 불렀으나 갑자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ㅇ과 ㅅ이 들어간 아름다운 글자였는데 혀를 아름답게 굴리면 나오는 부드러운 소리라는 것만 기억이 났다. 연성, 성연, 연수, 수영, 성우, 승우.. 어떤 글자의 조합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꿈이라는 무의식에서 깨어나 그 글자의 정체가 성연인 것을 떠올렸다. 무의식에서 나는 부드럽고 하얗고 푹신한 구름 사이로 떠돌아다니며 내 조카의 이름을 끝없이 조립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성연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성연은 내게 "이모, 하늘의 구름같이 폭신한 곳이야" 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급한 표현이라는 것을 나는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어도 그 무의식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찾기는 어려웠다.

 

현태는 보라의 이런 꿈 얘기를 주의깊게 들었다. 보라는 현태의 집중함과 사소한 관심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녀의 사소한 기억을 현태가 감싸안 듯이 보아주니 보라는 안정감과 깊은 애정을 느낀 것이다. 현태와 보라는 오래된 친구처럼 연인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사적이고 사소하고 쓸데없는 얘기를 오래 했다. 하지만 현태는 별안간 보라에게 등을 돌렸다.

 

현태는 데이트 전날 보라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무섭다고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현태는 보라를 이상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그는 그녀가 멘탈이 아주 바스라져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녀를 툭하고 아주 살짝만 건들여도 그녀가 사방으로 부서져 그 유리조각에 그의 발이 다쳐 피가 철철 흐를 것 같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보라가 그렇게 멘탈이 바스라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깊이 사랑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했는데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보라는 그를 곧 사랑하게 될 모양이었으며 그렇게 되면 보라는 그에게 집착하게 될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는 불행해질 것이었다.

 

보라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사실 보라는 그를 사랑할 것 같기는 했다. 그는 멀끔하고 키가 크고 똑똑하고 그녀의 말을 잘 들어줬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녀는 쉽게 사랑에 빠지니까. 아니, 그녀는 사랑에 빠질만한 구석을 너무 쉽게 발견하는 성격이니까. 그렇게 되면 그도 어쩌면 보라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을 테고, 아니 사실 그도 보라를 사랑할 준비를 마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성급히 보라를 밀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현태는 보라의 정서적 불안정함을 파악하자마자 그녀와의 만남의 싹을 잘랐다. 시작도 전에 싹을 아예 툭 잘라서 밟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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