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너를 이토록 잘라놓았니 (박세랑,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응급실에서 눈을 뜬 아침, 절망이 동공을 힘껏 긋고 지나가는데 등이 구부정한 아버지가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표정으로 내 곁에 앉아 있다 얘야 무엇이 왜 이토록……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니 병실 침대맡에서 아버지의 눈빛이 흐릿하게 묻고 있다 아버지 달이 자꾸만 커지는 게 무서워서요 새벽녘에 커다란 보름달이 목을 졸라댔거든요 자세히 보니 달은 창백하게 얼어붙은 내 과거의 눈동자였어요 그걸 쳐다보고 있자니 동공이 깨질 듯이 쓰라려서요 싸늘하게 겪은 일과 시퍼렇게 당한 일 사이에 걸터앉아서 손목을 사각사각 깎아냈을 뿐인걸요 연필 가루처럼 떨어지던 피가 어느새 통통한 벌레로 변하더니 바닥을 기어다니던데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어이 발설하기 위해서 뾰족하게 깎아지른 손목으로 나는 또박또박 상처를 기록합니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존재들만 골라가며 사랑했어요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불쌍해서 좀 안아줬더니 결국엔 뺨을 치고 주먹을 날리던걸요 만삭처럼 부풀어오르는 비명 속에서 폭력은 예고 없이 태어나 칭얼대고요 어르고 달래던 결핍은 무럭무럭 자라나 손목을 토막 내는 취미가 생겨버렸죠 꿈틀꿈틀 한 손으로 이렇게 아버지 곁을 기어다니면 되잖아요 창가에 서린 입김처럼 하얗게 내려앉은 아버지는 닦으면 닦을수록 흐릿하게 지워지는데 방안에서 너덜대는 손목을 기어이 발견해 병원에 실어나를 때마다 아버지의 눈빛이 자꾸 묻는다 무엇이 왜 이토록…… 너를 사랑하지 않았니

'어른이 되면 헌책방을 해야지'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간판 이름으로 써놓은 지 오래이다

발에 걸리는 돌들 가운데

눈에 걸리는 돌들 제법

모아둔 지 오래이다

돌로 문지방을 쌓을 요량이다

문턱 앞에서 숨 한번 고르시라고

돌에게 의지해온 지 오래이다

김사인 선생님이 집어다준 돌도 있고

윤제림 선생님한테 뺏어온 돌도 있다

책도 골라놓은 지 오래이다

버릴 책은 애초에 버려질 책

버렸다가 다시 들고 온 책은

어떻게 해서도 버려지지 않을 책

(당신은 어떤 책을 원하십니까)

책장도 디자인해놓은 지 오래이다

아직 수종을 고르지는 않았으나

상상하자면 달팽이관을 닮은 미끄럼틀 형세다

미끄러지자 책과 책 사이에서 미끄러져보자

근데 나 언제부터가 어른일까

그때가 이때다 불어주는 호루라기

그런 거 어디 없나 그런 게 어디 있어야

돌도 놓고 돈도 놓고 마음도 놓는데

매일같이 놓는 건 체중계 위에 내 살 가마니라니

 

국회의원만 봐도 제가 어른이다 싶으니까

나밖에 없습니다 나 같은 어른 어디 없습니다

새벽같이 띠 두르고 나와 명함 돌려가며 뽑아줍쇼

입술에 침 발라가며 부처웃음 만개인 걸 텐데

(당신은 어떤 정치인을 뽑아왔던 겁니까)

샘플로 견적내볼 어른 왜 없을까 국회방송 좀 보자니

어른은 어렵고 어른은 어지럽고 어른은 어수선해서

어른은 아무나 하나 그래 아무나 하는구나 씨발

꿈도 희망도 좆도 어지간히 헷갈리게 만드는데

TV조선 앵커는 볼 때마다 왜 저렇게 조증일까

목 졸린 돼지처럼 왜 늘 멱따는 소리일까

넥타이가 짧은가 목이 두껍나 뭐가 좀 불편하면

넥타이를 풀든가 목살을 빼든가 뭘 좀 하든가 하지

아 답답해 아 시끄러 아 짜증나 아 언니

텔레비전 좀 끄라니까 정신 사나워 죽겠잖아

조카 젖 먹이고 트림 기다리느라 애를 어르는

동생의 팔놀림은 내게 처음 해 보이는 포즈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절로 되는 아기 바구니

엄마가 되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엄마만 되면 헌책방을 해도 될까나

하루 지나 매일 하루씩

가게 오픈 왜 미루느냐는 물음에 답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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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문학동네 시인선 84권. 김민정 시인의 세번째 시집. 거침없는 시어와 톡톡 튀는 상상력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펼쳐오며, 많은 후배 시인들에게 강한 영감과, 영향력을 주고 있다는 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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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사라는 뉴스레터에서 소설가 장강명이 추천해준 시다. 

장강명의 코멘트다.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장강명입니다.

그러게요. TV조선 앵커는 왜 저렇게 목소리 톤이 높을까요. 조선중앙TV에 기백으로 눌려서는 안 된다고 다짐이라도 하는 걸까요. 전하는 내용도 대개 그렇습니다. 듣다보면 아 답답해 아 시끄러워 아 짜증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래요, 그런 것 같아요. 아무나 해요 어른. 스물여섯 살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어른 됨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느꼈습니다. 삶의 불확실성을 껴안는 것. 태연한 표정으로, 깜깜한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는 것.

그런데 그런 얘기 요즘은 잘 안 하죠. 저는 저대로 깨달음의 감흥이 희미해졌고, 세상은 세상대로 어른 됨의 의미를 깊이 알고 싶어하지 않고, 어렵고 어지럽고 어수선해서 피로감이 듭니다. 제 나이도 애매합니다. 어른 됨을 말하는 사십대는 철이 덜 들었든지 꼰대든지 둘 중 하나 아닐까요(김민정 시인은 사십대가 되기 전에 이 시를 쓰셨습니다).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에 실린 시들을 좋아합니다. 시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단어가 툭툭 튀어나와 슬며시 웃음이 나고, 직진하는 화법이 후련합니다. 삶과 세상이 단정해지면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어떤 일인가요? 저는 헌책방을 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운영하는 헌책방을 찾아가보고 싶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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