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추워서 편의점에서 핫팩을 샀다. 그가 내게 집이 춥냐면서 불쌍하다고 침낭을 하나 주고 핫팩도 잔뜩 사다주겠다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나서 울컥했다. 그는 나를 안쓰럽게 보고 불쌍하게 여겼으며 자신이 도와줄 것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말에 담긴 애정이 그리웠던 건지, 핫팩을 들고 지하철로 출근을 하는 내내 우울함이 밀려들었다. 이런 따뜻한 애정의 순간이 더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느끼는 우울함과 슬픔도 깊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짧은 기간을 사귄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화가 나는 것은, 생각이 들수록 그가 생각보다 더욱 괜찮은 사람이라는 점에 있다. 내가 이만한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하게도 딱 마주치게 되는데 어떻게 우리가 만나게 됐을까, 싶은 것이다.

나는 그와 내가 아주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정말 비슷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가 나를 향해 가졌던 생각과 마음이 그저 순수하게 애정과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내 자신이 싫어진다.

나는 바보같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랑인가,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에는 얼마나 큰 힘이 있는가를 항상 따져봤다. 그런데 모든 것이 끝난 뒤 그것이 그저 순수하게 애정과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내 자신이 매우 싫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원망하는 것에 더해 슬픔이 마음 안쪽으로부터 차오른다.

슬픔은 마음 안쪽으로부터 차올라, 태초에 바다가 생겨나듯이, 물이 고이고 고여 깊어지고 깊어져 거대한 바다를 만들어 수면이 찰랑대는 것처럼, 내 슬픔도 차오르고 차올라 그것이 눈물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관찰하다가 점심시간에 밥을 안먹고 눈물을 흘렸다. 내 눈물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다. 눈물로 감정이 표현되는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는 얼마간 울다가, 흘린 눈물만큼의 슬픔이 내 마음에서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진정이 됐다. 하지만 나는 비참하게 구걸을 하고 싶어졌다. 마치 나를 비추는 사랑은 그 혼자 소유하고 있는 냥, 난 그에게 다가가서는 다시 그 빛을 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다시 한번만 생각을 바꿔줘 제발.

이것은 어찌보면 사랑놀이를 한바탕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엇을 그토록 대단한 그 무엇을 했다고. 나는 사랑의 기간보다 더 오랜 기간을 슬픔에 빠져있는가 말이다.

난 다시 한번 카톡에 들어가 사진으로 그의 얼굴을 본 뒤 그가 여전히 귀엽다고 느꼈다. 예전에는 이 얼굴을 내가 만지고 뽀뽀하면서 귀여워했었는데 이제는 없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더 우울해졌다. 그런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시절의 감정을 느꼈던 날들도 그리운 날도 오겠지.

 

보라는 때때로 현성을 생각했다. 아무런 서사도 아무런 정보도 없는 만남이었다. 그런데도 현성과의 짧은 만남이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보라와 현성은 서로 누구인지도 모른채 통화를 했다. 술에 취한 보라는 혀가 꼬부라져서는 엉엉 울다가 웃다가 애교를 부렸다. 그게 귀여워서인지 현성은 보라를 만나고 싶다고 졸라댔다. 현성은 추론에 추론을 더해 보라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둘은 만났다.

 

보라는 아무말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현성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보라는 현성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너는? " "하지만 나는 보라가 누구인지 모르는걸" "그렇지만 보라는 현성이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현성이는 아니야? 그런거야? 얼른 좋아한다고 말해. 얼른! " "그래 보라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그런데 제일 좋다면서 왜 얼굴을 안보여주니." 따뜻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보라는 집이 어딘지 말을 안해줄 수가 없었다.

 

"현성이는 보라한테 뭐 해줄건데?"

"뭐를 해줄까. 뭐 해줬으면 좋겠어?"

"음 안아줄래?"

"그래 내가 안아줄게."

"안아만 줘야 돼 알았지?"

"그럴게."

 

보라는 안아만 준다는 현성의 말이 개수작이나 느끼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그저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일면식도 모르는 남자지만 보라를 안아만 줄 것 같았고 그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현성이를 만나게 됐다. 보라는 현성을 발견하자마자 현성이에게 가서 안겼다. 길을 잃고 헤매던 새끼 양이 엄마 품에 돌아와 안기듯이. 그렇게 와락.

 

키가 큰 현성의 어깨는 보라의 머리 위를 훌쩍 넘었다. 단단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고 보라의 어깨를 감싸 안는 현성의 팔이 따뜻했다. 현성은 보라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품에서 떼 보라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보라는 내가 현성의 마음에 들었을지, 두근대며 기다렸다. 현성은 다시 보라를 안았다. 그녀는 조바심이 났다. 그의 마음에 들었을까. 통과인가. 아닌가.

 

보라는 현성의 허리를 잡고 얼굴을 가슴에 묻고 한참을 서 있었다. 자신이 사는 집 근처 골목에서. 어두운 골목에서. 그녀는 이곳을 앞으로도 수 십번, 수 백번을 지나다닐 것이고 그때마다 가끔 현성과 자신을 생각하게 될 것이었다. 그 장면은 어떻게 기억될까. 한 때 외로움에 미쳐 행했던 어리석은 행동으로 기억될까. 성욕을 쫓아 온 어떤 남자의 실패담으로 기억될까. 아니면 그저 아름답게 포장한 사랑스러운 포옹으로 기억될까.

 

아무려면 어때. 보라는 이 순간이 지속하길 바랐다. 현성은 보라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우리 이틀 뒤 이곳에서 오후 3시에 보자”고 약속을 했다. 그렇게 둘은 십여분을 더 안고 있었다. 그리고 현성은 손을 흔들며 사라졌고 보라는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고 때때로 보라는 그곳을 지나며 현성을 생각한다.

 

 

보라는 그렇게 환과 헤어졌다. 환은 보라에게 막 대했다. 보라는 그게 막대한 건지 환의 성격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환을 사랑하자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분이 나빠져서 성질을 내니 환은 연락을 끊어버렸다. 보라는 마음이 아팠다. 이정도밖에 안되는 쉬운 인연인가 했다. 환을 사랑하고자 했는데 환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한편으로 보라는 속이 시원했다. 그와 좋았던 기억이 없어서인지 그를 금방 잊었다. 사실 보라는 그를 사랑했다기보다 그가 그녀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한 셈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재력과 그의 사회적 위치였다. 그는 그녀에게 나중에 살림을 하지 않아도 되며 운전 같은 건 하지말고 택시를 타고 다니라고 했다. 그는 부자였다. 또 서울대 출신이었고 현재 유망한 스타트업에서 일하니 앞으로 성공은 따라오게 돼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가져다줄 아름다운 미래가 사라져서 보라는 슬펐을 뿐이다.

 

보라는 그녀에게 그 정도로 찬란하게 아름다운 미래를 가져다 줄리가 없겠지만, 성실하고 똑똑하고 다정한 현우를 만나보기로 했다. 마음이 따뜻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그는 성실했다. 현우는 큰 야망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 점이 보라에게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다. 가끔 우울한 것도 같았다. 다른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삶이 펼쳐진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건 안정감일수도 있다. 현우의 일상과 반복적인 루틴이 보라에게는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현우의 그러한 점이 삶에 안정적 기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라는 늘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극도로 불안정한것을 파악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더 불안정해 보이는 현태였다.

 

보라와 현태는 소설 얘기를 시작하는 사이로 친밀해졌다. 현태는 소설로 등단한적이 있는 작가였다. 한때는 소설을 열심히 썼으나 이제는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보라는 언젠가는 등단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만 할 뿐이었지만 현태는 그 꿈을 현실로 이뤄낸 사람이었기에 그가 멋있어 보였다.

 

둘은 소설과 소설가들에 대해 오래도록 얘기를 하다가 종종 자신이 꾼 꿈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꿈에서 세계의 종말을 겪었다든가 음악이나 단어의 상징이 나온다든가 하는 얘기였다. 보라는 소리가 시각화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보라의 꿈은 이렇다. 

나는 꿈에서 내 조카의 이름을 불렀으나 갑자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ㅇ과 ㅅ이 들어간 아름다운 글자였는데 혀를 아름답게 굴리면 나오는 부드러운 소리라는 것만 기억이 났다. 연성, 성연, 연수, 수영, 성우, 승우.. 어떤 글자의 조합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꿈이라는 무의식에서 깨어나 그 글자의 정체가 성연인 것을 떠올렸다. 무의식에서 나는 부드럽고 하얗고 푹신한 구름 사이로 떠돌아다니며 내 조카의 이름을 끝없이 조립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성연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성연은 내게 "이모, 하늘의 구름같이 폭신한 곳이야" 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급한 표현이라는 것을 나는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어도 그 무의식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찾기는 어려웠다.

 

현태는 보라의 이런 꿈 얘기를 주의깊게 들었다. 보라는 현태의 집중함과 사소한 관심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그녀의 사소한 기억을 현태가 감싸안 듯이 보아주니 보라는 안정감과 깊은 애정을 느낀 것이다. 현태와 보라는 오래된 친구처럼 연인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사적이고 사소하고 쓸데없는 얘기를 오래 했다. 하지만 현태는 별안간 보라에게 등을 돌렸다.

 

현태는 데이트 전날 보라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무섭다고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현태는 보라를 이상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그는 그녀가 멘탈이 아주 바스라져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녀를 툭하고 아주 살짝만 건들여도 그녀가 사방으로 부서져 그 유리조각에 그의 발이 다쳐 피가 철철 흐를 것 같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보라가 그렇게 멘탈이 바스라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깊이 사랑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했는데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보라는 그를 곧 사랑하게 될 모양이었으며 그렇게 되면 보라는 그에게 집착하게 될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는 불행해질 것이었다.

 

보라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사실 보라는 그를 사랑할 것 같기는 했다. 그는 멀끔하고 키가 크고 똑똑하고 그녀의 말을 잘 들어줬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녀는 쉽게 사랑에 빠지니까. 아니, 그녀는 사랑에 빠질만한 구석을 너무 쉽게 발견하는 성격이니까. 그렇게 되면 그도 어쩌면 보라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을 테고, 아니 사실 그도 보라를 사랑할 준비를 마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성급히 보라를 밀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현태는 보라의 정서적 불안정함을 파악하자마자 그녀와의 만남의 싹을 잘랐다. 시작도 전에 싹을 아예 툭 잘라서 밟아버렸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