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너를 이토록 잘라놓았니 (박세랑,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응급실에서 눈을 뜬 아침, 절망이 동공을 힘껏 긋고 지나가는데 등이 구부정한 아버지가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표정으로 내 곁에 앉아 있다 얘야 무엇이 왜 이토록……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니 병실 침대맡에서 아버지의 눈빛이 흐릿하게 묻고 있다 아버지 달이 자꾸만 커지는 게 무서워서요 새벽녘에 커다란 보름달이 목을 졸라댔거든요 자세히 보니 달은 창백하게 얼어붙은 내 과거의 눈동자였어요 그걸 쳐다보고 있자니 동공이 깨질 듯이 쓰라려서요 싸늘하게 겪은 일과 시퍼렇게 당한 일 사이에 걸터앉아서 손목을 사각사각 깎아냈을 뿐인걸요 연필 가루처럼 떨어지던 피가 어느새 통통한 벌레로 변하더니 바닥을 기어다니던데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어이 발설하기 위해서 뾰족하게 깎아지른 손목으로 나는 또박또박 상처를 기록합니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존재들만 골라가며 사랑했어요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불쌍해서 좀 안아줬더니 결국엔 뺨을 치고 주먹을 날리던걸요 만삭처럼 부풀어오르는 비명 속에서 폭력은 예고 없이 태어나 칭얼대고요 어르고 달래던 결핍은 무럭무럭 자라나 손목을 토막 내는 취미가 생겨버렸죠 꿈틀꿈틀 한 손으로 이렇게 아버지 곁을 기어다니면 되잖아요 창가에 서린 입김처럼 하얗게 내려앉은 아버지는 닦으면 닦을수록 흐릿하게 지워지는데 방안에서 너덜대는 손목을 기어이 발견해 병원에 실어나를 때마다 아버지의 눈빛이 자꾸 묻는다 무엇이 왜 이토록…… 너를 사랑하지 않았니

바가지 머리 (박세랑, 뚱한 펭귄처럼 걸어가다 장대비 맞았어)

 

누가 내 머리 좀 먹음직스럽게 깎아주세요 재봉을 잘못한 인형이거든요 표정이 굳은 식빵이라서 아무한테도 안 팔리거든요 집집마다 걸쳐놓은 애인들은 우주로 이사갔나봐 필요할 땐 주파수가 안 잡히거든요 밀린 공과금에 목구멍이 꽉 막힌 하수도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거든요 배고파서 만두 소세지 유부남을 한꺼번에 우물거리며 시식 코너를 한 바퀴 빙 돌고 나면 배짱이 두둑해져요 콩팥에 붙은 혹덩이처럼 덜렁덜렁 달고 다니기 불편한 남자들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요 두부처럼 하얗고 깍듯한 애인 건져먹을 건덕지도 없어서 맹탕인 애인 누가 싫증나서 내다버린 의자 위에 올라타 찌그덕삐그덕 밤새도록 놀다가 추락했는데 또 밑바닥이네? 바닥을 벗어나면 더 캄캄한 밑바닥이 기다리는데요 발냄새 나서 걷어찼더니 입냄새 나는 두꺼비가 종일 들러붙는데요 빨랫줄에서 떨어진 불알을 달고 허겁지겁 쫓아오는 남자들 살려고 열심히 쫓아가다보면 개처럼 쫓겨날 일도 생겨날 텐데 뻐끔뻐끔 이산화탄소나 내뿜으면서 공기를 탁하게 만들고 있어요 콘크리트처럼 겹겹이 쌓아올린 하늘을 구경하다 돋보기로 지붕들을 태워먹어요 쭈글쭈글 헐렁한 입술보다 츄파춥스가 훨씬 달콤할 텐데 머리가 뻗친 잡초들은 여기저기 짓밟혀도 잘만 클 텐데 찢긴 낙하산을 타고 싹둑싹둑 날아다니다

 

씨익 웃고,

버르장머리 없이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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