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연애, 그러니까 혼자만의 연애를 생각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썸'이 많은 편이었다. 연애는 적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장면들, 남자가 내게 잘해주는 것과 그것에 설레는 나 자신을 보는 장면이 떠오를 때면 나는 내가 아주 더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남자들의 얼굴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다. 난 왜 이다지도 쉽게 내 마음 속에 그렇게 많은 남자들을 들여왔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말 내 마음에만 들어왔다는 것이다.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남자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 자체로도 나는 정말이지 괴롭다. 

아, 내가 마음을 줬던 그 시간만큼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라고 그 시간만큼의 사랑이 또다시 지나간다. 

 

그 시간 내게 사랑을 선사했던 그 무수한 남자들은 그 시간만큼의 사랑을 줬고 나는 그들을 전부 다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회사에서도 어떤 남자를 좋아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도 나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는 아주 많이 나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정도, 나를 귀엽다고 느낄 정도, 나의 이러저러한 요구를 들어줄 정도, 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줄 정도로만 나를 좋아했다. 

 

그는 열렬한 사랑을 보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냥 그 정도의 간단한 좋아함을 보냈지만, 그 정도의 달달함도 내겐 충분했다. 그런 달달한 감정이 묻어있던 그의 얼굴 그의 눈 그의 목소리 같은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이상해진다. 그는 종종 회사에서 내곁을 지나간다. 당연하다.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고 그냥 그는 그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회사에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그럼에도 그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서로를 서로의 무엇이라고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공간의 같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댔고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내 어깨에 가끔 안겨왔고 나도 그를 쓰다듬어줬다. 나는 그에게 힘들다 했고 그도 내게 힘들다 했다. 

 

아주 가끔 우리는 술을 마셨는데, 그는 내게 "평소에는 싸가지없게 굴더니, 술 마시면 애교부려서 귀엽네. 자주 멕여야 겠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먹으며 오므려지는 입술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자신도 술을 들이키는 것이다. 

 

우리는 나란히 놓여진 책상에 나란히 앉아 근무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이 아주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며 오래 그를 쳐다보았고 그도 나를 쳐다봤다. 나는 누군가 좋아지면 그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는데 그것은 그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린 일을 하다말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한 어떤 시간도 가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장면들은 완전히 잊고 있었고,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그에게 차였으며 엄청나게 울어댔다. 울고 욕을 하고 난리를 치다가 또 몇달이 훌쩍 지났기에 그를 완전히 잊고 생각하거나 떠올리지도 않았다. 

오늘은 어쩐일인지 문득 그 장면장면들이 고스란히 마음에 떠올랐다. 이유가 뭘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것이라고 정의내린 적도 없고 사랑을 속삭인 적도 없고. 그러니까 정말 아무것도 없었는데. 

 

차라리 내 전남친,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가 서로의 연인이라는 공식적인 관계를 맺은 뒤, 이제 우리는 아무 관계가 아니라 다시 공식적 관계를 내린 그 관계가 끝나자 왜 그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서 일어났던 그 장면이 떠오른 것일까. 대체 왜. 

 

그 장면과 이 장면이 떠오르며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 그러니까 매우 설레고 좋아한다는 그 감정은 여전히 같은 종류로 나를 감싼다. 그것은 누구 때문인가. 그것이 특정한 어떤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쉽게 좋아하고 설레하다니, 나는 내가 몹시도 더럽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나는 내 마음을 너무 쉽게 그들에게 맡긴 것이다. 정말 너무 쉽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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