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대로 편안한 하루였다. 부서장과 팀장이 새로 바뀌니 아주 편안했다. 사람 스트레스가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거였다. 나는 업무스트레스만 받았다. 하루종일. 이것은 상당히 견디기 쉬운 것이었다.

 

세상이 이렇게나 신경질이 나지 않아도 되다니. 새삼 감탄한다.

 

편안한 하루였으나, 계속 울컥했다. 울컥한 것은 헤어짐 때문이었다. 헤어지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나의 뇌에는 그를 생각하는 것이 들어차 있었다. 그것은 밀어내도 밀어내지지 않았다.

 

밀어내지지 않아, 나는 억지로 일을 열심히 해봤다. 각종 지식들을 가득 채우려고 했다. 조금씩 그의 생각이 밀려나갔다.

 

내가 어쩌면 그를 그렇게나 좋아하고 그에게 집착한 것은, 어쩌면 내 생활이 너무너무 팍팍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부서를 옮기기 전에 아주 신경질을 자주 부리고 짜증을 잘 내는 부장, 배려심이나 이해심이 전혀 없는 팀장 밑에 있었고, 내 삶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니 그가 내게 건네는 톡과 전화는 내 삶에 있어 한줄기 빛이었고, 꿀떡 마실 수 있는 물이였다.

그 날을 기억한다. 하루종일 부서장이 쏘아대는 신경질과, 날카로운 고음, 그리고 그의 제스처에 실려있는 악한 감정들이 내게 쏟아져 있던 날이었다. 나는 그 감정들에 싸여서 완전히 죽어가고 있었다. 하루의 끝은 그렇게나 부정적이었다.

 

그때 그에게 걸려온 전화,나는 한줄기 빛과 사랑을 발견했다. 완전히 캄캄해진 안개 속에서 누군가 손전등으로 나를 비추는 기분이랄까. 그와의 잠깐 몇분의 통화가 나는 그렇게도 좋았다. 나는 어쩌면 그를 그가 그 자신이라서 좋아한 것이 아니라, 나의 결핍에서 등장한 존재이기 때문에, 결핍속에서 찾아낸 사랑이라 좋아한 건 아닐까.

 

나는 결핍이 지속돼, 그를 그가 그렇게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좋아하게 됐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어쨌든 나는 그를 좋아하고 , 그에게 집착했고, 그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삶을 통째로 보여줬다. 그는 일어나고 회사를 뛰어가고, 업무를 보고, 빠르게 점심을 먹고 다시 일을 하다가, 상사에게 지시를 받고, 부하직원에게 요청을 받는 그 시시콜콜한 모든 일상을 내게 전했다. 그의 하루가 내게 고대로 전해졌다.

나는 그의 그 일상에서 그의 피곤함과 조급함 등을 봤다. 그는 성과를 내야했고 책임감이 있었다. 그는 나와는 다른 중간관리자였으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벌어들인 돈을 전부 다 썼다. 그리고 남들에게도 썼다. 그는 하루에 100만 원을 넘게 쓰기도 했다. 100만 원, 200만 원을 썼다. 술을 마시고 최고급의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갔다. 그만큼 소비할 수 있는 시간조차 짧은 거였다. 그 짧은 시간에 가장 좋은 것을 스스로에게 대접했다.

 

그는 언제나 달리고 달렸다. 그의 엔진은 끝나지 않는, 그러니 그의 생명이 다해 죽음에 이르러서야만 끝날 것 같은 그런 엔진이었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는 그 사람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고상한 직업을 가졌는가 하는 생각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나는 실제로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훈수를 두는 것에 불과한 거였다. 이것은 먹물계의 고상함인가. 뇌를 쓰는 일의 고상함인가.

어떤 선배는 우리들이 하는 일을, 먹물계의 3D라 부르기도 했으며, 공포심에서 글을 쓴다고도 했지만, 나는 그의 하루하루를 들여다보며 느꼈다.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데 그치고 잘못되면 홍보팀에서 전화가 오는데 그치지만 그는 까닥하면 돈 수천, 수억이 날라가는 일을 하는구나. 우리가 절박한 정도는 사실 매우 다른 것이었다.

 

내가 하는 일은 그에 비하면 쉬운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니면 사실 직업 자체에서 오는 차이가 아니라, 그와 나의 직책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떻든 그는 중년에 접어들었다.

 

그의 어떤 하루는 평온했다.어떤하루는 화를 냈고 또 다른하루는 지쳤다. 평온한 날에는 내게 신경을 썼지만 화가 나는 날에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거나 잠을 잤고, 지친 날에는 내게 왔다.

 

그의 하루들이 모이다보니, 그의 인생이 자꾸 내게 와서 그를 좋아하게 됐다. 그랬던 날들이 자꾸 생각나서, 나는 그냥 회사 모니터 앞에서 울컥, 눈물이 나려고 한다. 나는 정말 멍청하고 경솔한 인간이다.

 

그렇게 한명의 인생이 내게로 이렇게도 가깝게 쏟아지는 일이 흔하던가. 그렇게 가감없이, 그리고 그렇게 솔직하게 내게 오는 것이 쉽더냐 말이다. 나는 그것을 발로 찼다. 그는 그렇게 떠났고 나는 이렇게 앉아 울컥, 한다.  

 

+ Recent posts